[인문학 산책] 500년전 세종의 국가 경영 키워드 '食民天'

세종대왕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대보라면 한글창제 하나를 들고 머뭇거린다. 조금 있다가 과학기술의 발달을 답하면 우수한 편이다. 명성에 비하면 홍보가 덜 되어 한국사 전공자로서 안타까운 책임감을 느낀다.

대왕은 1397년(태조 6),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 해 태어났다. 아버지가 잦은 가뭄 앞에 부덕을 자책하면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 그는 23세의 청년이었다. 32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1450년에 53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치적은 수백년간 '동방의 요순'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글창제,과학기기 제작만으로는 가당치 않은 극찬이다. 무슨 일을 했던가. 세종은 즉위 다음 해 집현전(集賢殿)을 세워 유능한 신하들을 학사로 뽑아 여기서 일하게 했다. 10명에서 시작해 최대 20명까지 늘렸다. 6품 이상의 관원수로는 중앙 관서 중 최다였다. 집현전 학사는 로테이션 근무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타 관서 경력이 승진에 유리한 관례를 깨고 부제학 이하 집현전 전임관은 고과 서열 1위로 쳐주어 한눈팔 필요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전문성 부여 인재육성정책을 쓴 것이다. 각종 행정 실무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집단을 양성한 것이다.

세종은 재위 10년까지는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유교국가가 나아갈 방향과 갖춰야 할 제도를 연구하게 했다. 이렇게 기초를 잡은 다음에 특화된 시정에 착수했다. 첫째 과업은 농정이었다. 농업은 당시 경제의 80~9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으니 중농정책의 표방은 곧 왕정의 1순위를 경제발전에 둔 것이다. 그는 "먹을거리는 백성의 하늘(食民天)"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올렸는데 국가경영의 의지를 잘 드러낸 말이다.

이전 왕조인 고려는 불교국가였지만 말기가 되면 유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내세만 강조하는 불교로서는 다스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세종대왕은 말로만 민본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 주어야 민본을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농사는 고려시대까지도 지력회복을 위해 한두 해씩 땅을 놀리는 휴한방식을 썼다. 고려 말에 볏을 단 보습(농기구의 일종)이 등장해 이런 제약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종 당대에도 이 선진 기술은 하삼도(충청·전라·경상도)에 제한돼 있었다. 세종은 재위 11년에 농사를 아는 집현전 학사를 뽑아 그 선진농업기술을 채방하여 '농사직설'이란 책자를 만들게 하고 그것을 평안도,함경도까지 보내 거기서도 선진농업기술을 써보게 했다. 전 국토의 선진 농업지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부단한 노력으로 이 과제가 달성됨으로써 백성의 생활도 향상되고 나라의 세수도 늘었다. 새 기술은 거름주기가 가능해져 단위면적 생산력을 크게 높여 국가와 백성의 경제를 한꺼번에 향상시켰다. 왕은 기술보급정책과 동시에 세제 개혁을 검토했다. 농사짓는 기술이 달라졌으니 세제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토질의 등급을 3등에서 6등으로 세분하고 풍흉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 새 제도의 초점이었다. 이를 위해 왕은 두 차례 18만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현직 관리,향촌의 유력자 외에 촌민까지 대상으로 한 조사였다.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던 일이다. 토질의 등급 구분은 어렵지 않지만 고을별 풍흉의 정도 측정이 난제였다. 그러나 이 난제도 세자(나중의 문종)가 측우기를 발명함으로써 해결을 보았다. 각 고을에 측우기를 설치해 비온 시각과 내린 양을 재서 도의 감사를 거쳐 호조에 보고되도록 해 가을 전세 결정 회의에 자료로 삼았다. 전품 6등,연분 9등의 신 세제는 측우기 발명 직후인 재위 26년에 확정 반포됐다.

대왕은 농시를 특별히 강조했다. 기술 집약화에 따른 필수사항이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본국력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4년부터 경복궁의 위도를 측정하는 각종 천문기구를 만들고 이어 시각 측정기구들을 제작해 그 성과를 근거로 재위 24년에 '칠정산내편'이란 '본국력'을 만들었다. 세종대의 천문기구는 전적으로 올바른 농정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왕은 또 이런 기구들이 설치된 경복궁의 뒤뜰에서 한 뙈기의 땅에 '농사직설' 에 적힌 기술대로 직접 농사를 지어보았다. 스스로 땅을 갈고 씨 뿌리고 김매기를 한 결과는 경기도 일반 농가보다 몇 배였다. 왕은 농정의 주요 과제가 거의 이뤄진 시점인 재위 27년에 '권농교서'를 내린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한 다음 신하들에게 백성이 농사 잘 짓게 이런저런 일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같은 해 '용비어천가'를 짓게 했다. 이즈음 또 백성들이 쉽게 제 뜻을 적을 수 있는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세종대왕의 치적은 내 백성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지혜와 노력의 힘으로 달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요순도 하지 못한,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적으로도 최고의 경영인으로 평가받을 업적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