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판도라의 상자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판도라의 상자를 비우며'라는 칼럼이 실렸다. 필자는 로저 코엔.그는 판도라의 상자가 몽땅 비워진 지금이야말로 미국에 새로운 희망이 솟아날 수 있다고 썼다. 현재의 경제 위기가 어쩌면 미국인의 도덕성과 근면성을 되찾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확실한 건 쓰고 또 써대던 수치스러운 습관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흥청망청한 결과 미국인들은 무려 2조6000억달러의 개인 부채더미에 올라앉았다. 마술 지팡이에 의해 이 부채가 덜어지기를 바랄 순 없다. 검소하게 새로 시작하는 것만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코엔이 이처럼 희망의 산실로 여긴 판도라의 상자가 국내에선 또 다시 뭔가 잔뜩 감춰진 비밀금고에 비유되고 있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지' 운운하는 게 그렇다. 그가 금품 로비를 벌였을지 모르는 정ㆍ관계 유력 인사들의 명단이 과연 밝혀질지를 두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그가 술에 취해 "민주당 386의원 가운데 내 돈 안받은 사람 없다"고 했다거나 여야 상관없이 여러 곳에 '보험'을 들었다는 소문이 떠도는 것도 의혹을 증폭시키는 듯 보인다. 구체적 리스트가 있다는 설과 함께 추측은 난무하지만 상자가 제대로 열릴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내가 입만 열면" 했던 사람 중에도 정말 연 사람은 없었던데다 인맥을 중시해온 그가 이제 와서 여러 사람을 곤경에 빠뜨릴 리 없다는 추정이다. 이래저래 상자는 닫히고 행여 들춰질까 전전긍긍하던 상자 속 유력 인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을 뻗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확실하게 밝히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파장이 크다고,얽힌 사람이 많다고 적당히 덮다 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구의원 후보에게 6000원짜리 설렁탕만 얻어먹어도 50배의 벌금을 물고 3만원짜리 식사 대접도 청탁이 있었으면 유죄라는 마당이다.

그런데 남의 법인카드로 1억원을 쓴 검사는 직무 관련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기업인에게 돈 받은 정치인 역시 대가성이 없다며 그냥 지나간다면 이땅에 희망은 없다. 뭐가 들었든 열기로 했으면 깨끗이 비워야 한다. 그래야 맨끝에 있던 희망이 날아오를 수 있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