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39) 3대 손바느질 양복점 ‥ 한땀 한땀 양복 손바느질 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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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3만명 … 외국인도 많아요
경력 25~45년 베테랑 기술자 25명이 한해 5000벌 만들어
결혼시즌엔 1~2시간 줄서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묘역 인근의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의 규모는 33㎡(10평) 남짓하다. 주변에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다 간판도 눈에 잘 띄지 않아 밖에서 보면 누가 찾아올까 싶을 정도다. 더구나 실내 인테리어도 평범하다. 한마디로 눈길을 끌 만한 점이 딱히 없다.
하지만 이 곳은 연간 4000~5000벌의 맞춤 양복을 만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제일 큰 손바느질 전문 양복점이다.
하루 평균 40~50명의 고객이 찾고 결혼 성수기에는 양복을 맞추기 위해 1~2시간씩 줄 서 기다릴 정도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황상연 대표(37)는 "기술자 25명은 경력 25년에서 45년의 베테랑들로 손바느질 솜씨가 국내 최고수준을 자랑한다"며 "여행이나 비즈니스로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및 해외 교포들도 우리 가게에서 양복을 맞춰 입고 갈 정도"라고 말했다.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은 고 황필주 옹(1965년 작고)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양복점에서 배운 기술로 1961년 고향인 충남 아산에 한일양복점을 내면서 시작됐다.
창업주는 양복점을 낸 뒤 힘겹게 운영하다 4년 만에 간암으로 사망했고 이 바람에 그 밑에서 기술을 배운 셋째 아들 황의설 회장(69)이 양복점을 물려받았다. 황 회장은 "기술을 배우면 밥은 굶지 않으니 눈 딱 감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에 가위와 바늘을 잡았다"며 "처음엔 손가락이 부르터 천으로 칭칭 동여매 가면서 가위질과 바느질을 배웠다"고 털어놨다.
황 회장은 양복점을 넘겨받은 이듬해인 1966년 서울에서 영업해야 돈을 잘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현재의 가게 옆에 티파니양복점을 냈다. 매장 면적 18㎡에 직원은 4명.자금 여력이 없어 유명 양복점이 모여 있던 남대문·소공동 일대에는 둥지를 틀지 못했다. 당시 서울에는 양복점이 700여개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한 벌에 70만~100만원 하는 맞춤 양복은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당포에서 잡아 줬지.기술자 월급은 손님이 주는 팁까지 포함하면 100만원이 넘어 월급날만 되면 요정이 이들로 붐볐다니까. 허허." 황 회장은 말을 이었다. "당시 양복장이들은 '공무원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지.월급 안 받아도 좋으니 기술만 배우게 해 달라며 지방에서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러나 호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황 회장은 대기업들이 기성복 시장에 진출했던 1980년대에는 맞춤 가격을 낮추고 평생 무료 수선 등의 서비스로 근근이 버텼다.
그러던 중 1995년 초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바뀐 건물주가 건물을 새로 짓겠다며 매장을 비워 달라고 한 것.황 회장은 맞춤 양복이 기성복에 밀리는 데다 새 건물을 임대하는 데 1억5000만원에 이르는 임대 보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자 사업을 접을지 여부를 놓고 몇 날을 고민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장남 황 대표는 "양복점을 제게 맡겨 달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처음엔 "아들을 양복장이로 만들지 않겠다"며 반대하던 황 회장은 생떼까지 부리는 아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금을 대출받아 옆 건물(현재 위치)에 가게를 얻어 준 뒤 경영을 맡겼다.
"당시 디자인이 멋들어진 기성복 시장으로 수요가 옮겨가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하루에 양복을 한 벌도 맞추지 못하고 공치는 날이 많았거든.그런 상황인데 아들한테 짐을 떠맡기고 싶은 애비가 어디 있겠어.그런데 지금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황 회장)
이렇게 해서 황 대표는 1995년 1월 삼육대 경영학과 2학년 때 국내 최연소(당시 24세)로 양복점 경영자가 됐다. 이듬해엔 상호를 '3대 손바느질 양복점'으로 바꿨다.
황 대표는 가업을 승계한 뒤 남다른 경영 수완을 보였다. 양복을 맞출 때마다 소량씩 도매상에서 구입하던 원단 및 원부자재를 본사에서 1년치를 한꺼번에 사는 방식으로 원가를 40% 떨어뜨렸다.
기술자들을 설득해 공임(품삯)도 40% 낮췄다. 최고급 원단을 사용하면서도 맞춤 가격을 기성복(40만~70만원)보다 싼 28만원에 내놓아 양복점 업계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 양복점은 2006년부터 기술자 경력과 사진을 공개해 고객이 원하는 기술자를 골라 양복을 맞추도록 하는 기술자 선택제를 업계 처음으로 도입했다. 양복을 맞출 때마다 기술자가 바뀌어 옷 모양이 달라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 같은 이유로 양복 안주머니와 허리춤에는 양복을 입을 고객 이름 대신에 기술자 이름을 부착한다.
황 대표는 "양복을 맞추기 위해서는 주문 가봉(시침질) 납품 등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고객으로서는 최소한 세 번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많았다"며 "하지만 고객의 신체 치수와 체형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기술자를 지정함으로써 양복점에 올 필요 없이 전화로 양복을 맞출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황 대표는 "3만명이 넘는 고객 중에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정·관계 종교계 기업계 등의 유명 인사들이 많다"며 "늦어도 2010년부터는 우리 양복점이 직접 디자인한 원단으로 양복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
경력 25~45년 베테랑 기술자 25명이 한해 5000벌 만들어
결혼시즌엔 1~2시간 줄서
서울 종로구 창신동 동묘역 인근의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의 규모는 33㎡(10평) 남짓하다. 주변에 점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다 간판도 눈에 잘 띄지 않아 밖에서 보면 누가 찾아올까 싶을 정도다. 더구나 실내 인테리어도 평범하다. 한마디로 눈길을 끌 만한 점이 딱히 없다.
하지만 이 곳은 연간 4000~5000벌의 맞춤 양복을 만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제일 큰 손바느질 전문 양복점이다.
하루 평균 40~50명의 고객이 찾고 결혼 성수기에는 양복을 맞추기 위해 1~2시간씩 줄 서 기다릴 정도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황상연 대표(37)는 "기술자 25명은 경력 25년에서 45년의 베테랑들로 손바느질 솜씨가 국내 최고수준을 자랑한다"며 "여행이나 비즈니스로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및 해외 교포들도 우리 가게에서 양복을 맞춰 입고 갈 정도"라고 말했다.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은 고 황필주 옹(1965년 작고)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양복점에서 배운 기술로 1961년 고향인 충남 아산에 한일양복점을 내면서 시작됐다.
창업주는 양복점을 낸 뒤 힘겹게 운영하다 4년 만에 간암으로 사망했고 이 바람에 그 밑에서 기술을 배운 셋째 아들 황의설 회장(69)이 양복점을 물려받았다. 황 회장은 "기술을 배우면 밥은 굶지 않으니 눈 딱 감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에 가위와 바늘을 잡았다"며 "처음엔 손가락이 부르터 천으로 칭칭 동여매 가면서 가위질과 바느질을 배웠다"고 털어놨다.
황 회장은 양복점을 넘겨받은 이듬해인 1966년 서울에서 영업해야 돈을 잘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현재의 가게 옆에 티파니양복점을 냈다. 매장 면적 18㎡에 직원은 4명.자금 여력이 없어 유명 양복점이 모여 있던 남대문·소공동 일대에는 둥지를 틀지 못했다. 당시 서울에는 양복점이 700여개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한 벌에 70만~100만원 하는 맞춤 양복은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당포에서 잡아 줬지.기술자 월급은 손님이 주는 팁까지 포함하면 100만원이 넘어 월급날만 되면 요정이 이들로 붐볐다니까. 허허." 황 회장은 말을 이었다. "당시 양복장이들은 '공무원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지.월급 안 받아도 좋으니 기술만 배우게 해 달라며 지방에서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러나 호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황 회장은 대기업들이 기성복 시장에 진출했던 1980년대에는 맞춤 가격을 낮추고 평생 무료 수선 등의 서비스로 근근이 버텼다.
그러던 중 1995년 초 최대의 시련을 맞았다. 바뀐 건물주가 건물을 새로 짓겠다며 매장을 비워 달라고 한 것.황 회장은 맞춤 양복이 기성복에 밀리는 데다 새 건물을 임대하는 데 1억5000만원에 이르는 임대 보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자 사업을 접을지 여부를 놓고 몇 날을 고민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장남 황 대표는 "양복점을 제게 맡겨 달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처음엔 "아들을 양복장이로 만들지 않겠다"며 반대하던 황 회장은 생떼까지 부리는 아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금을 대출받아 옆 건물(현재 위치)에 가게를 얻어 준 뒤 경영을 맡겼다.
"당시 디자인이 멋들어진 기성복 시장으로 수요가 옮겨가면서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하루에 양복을 한 벌도 맞추지 못하고 공치는 날이 많았거든.그런 상황인데 아들한테 짐을 떠맡기고 싶은 애비가 어디 있겠어.그런데 지금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황 회장)
이렇게 해서 황 대표는 1995년 1월 삼육대 경영학과 2학년 때 국내 최연소(당시 24세)로 양복점 경영자가 됐다. 이듬해엔 상호를 '3대 손바느질 양복점'으로 바꿨다.
황 대표는 가업을 승계한 뒤 남다른 경영 수완을 보였다. 양복을 맞출 때마다 소량씩 도매상에서 구입하던 원단 및 원부자재를 본사에서 1년치를 한꺼번에 사는 방식으로 원가를 40% 떨어뜨렸다.
기술자들을 설득해 공임(품삯)도 40% 낮췄다. 최고급 원단을 사용하면서도 맞춤 가격을 기성복(40만~70만원)보다 싼 28만원에 내놓아 양복점 업계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 양복점은 2006년부터 기술자 경력과 사진을 공개해 고객이 원하는 기술자를 골라 양복을 맞추도록 하는 기술자 선택제를 업계 처음으로 도입했다. 양복을 맞출 때마다 기술자가 바뀌어 옷 모양이 달라지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 같은 이유로 양복 안주머니와 허리춤에는 양복을 입을 고객 이름 대신에 기술자 이름을 부착한다.
황 대표는 "양복을 맞추기 위해서는 주문 가봉(시침질) 납품 등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고객으로서는 최소한 세 번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많았다"며 "하지만 고객의 신체 치수와 체형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기술자를 지정함으로써 양복점에 올 필요 없이 전화로 양복을 맞출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황 대표는 "3만명이 넘는 고객 중에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정·관계 종교계 기업계 등의 유명 인사들이 많다"며 "늦어도 2010년부터는 우리 양복점이 직접 디자인한 원단으로 양복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