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협박한 직접 증거 없으면 통화옵션계약 유효"

법원, 가처분 신청 기각 … 키코 줄소송 영향 줄까 주목

한 중소기업이 은행의 협박에 못 이겨 통화옵션계약을 맺었다며 제기한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기각했다. 이는 통화옵션계약의 일종인 키코(KIKO.knock-in knock-out)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소송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나온 법원의 결정으로 향후 키코 본안 재판 과정에서 법원의 판단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다. 금형제품 수출기업인 K사는 신한은행과 지난 5월 하단방어환율(풋옵션) 945원,상단환율(콜옵션) 995원에 통화옵션계약을 체결했다. 원.엔 환율이 엔당 945원보다 아래로 떨어지면 업체가 유리하고 995원을 넘으면 은행 측이 이득을 보는 계약이었다. 그러나 원.엔 환율이 올 하반기 들어 급등하자 K사는 "은행에 해당 계약에 대한 거래의향서만 보냈을 뿐인데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금융제재를 가하겠다"는 은행 측의 협박에 못 이겨 강제로 계약을 체결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수석부장판사 이동명)는 18일 K사가 신한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통화옵션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K사는 은행의 협박에 못 이겨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하나 제시한 증거만으로는 협박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약정서 및 확인서 등도 정상적으로 작성했으므로 K사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간접적인 증거만으로는 협박이 있었다는 일방적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K사가 제시한 증거는 협박 당시의 상황이 아닌 이후에 K사가 은행 직원에게 '협박이 있지 않았느냐'며 추궁하는 내용만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또 계약 체결을 위해 작성된 서류에도 위법사항이 없었고 이후 계약에 따른 결제도 정상적으로 이뤄진 만큼 계약의 효력을 정지하는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동명 수석부장판사는 "환율 급등으로 키코 등 일부 통화옵션계약의 불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이에 편승해 정상적인 계약을 맺어놓고도 불공정하다며 은행을 상대로 제기하는 소송이 최근 크게 늘었다"며 "은행의 절차상 잘못이 명백하지 않는 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이번 판단을 통해 상당수 중소기업들이 '키코에 가입하지 않으면 금융제재를 가하겠다'는 등 은행의 협박에 의해 계약을 체결했다며 제기한 '키코'소송에 대한 법원의 입장을 일부 엿볼 수 있게 됐다. 한 대형로펌의 변호사는 "현재 가처분이 진행 중인 키코 사건은 설명의무 위반,계약 불공정성을 다투고 있어 계약무효를 주장한 이번 건과는 조금 다르나 상당수의 기업들이 키코 본안 소송에서 은행의 강요에 의한 계약무효를 주장하고 있다"며 "향후 비슷한 주장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모나미 등 2개 중소기업이 SC제일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키코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결정은 연내에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변호인단은 지난주 서면제출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 수석부장판사는 "키코 계약이 황당하다는 것은 모두 인정하는 바나 키코계약이 제대로 이행되면 해당 중소기업들이 조만간 도산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반면 계약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은행 측이 떠안을 손해는 분명치 않으나 은행이 망하면 국가적으로 더 큰 혼란이 우려되는 만큼 국익 차원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