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인터뷰] JLPGA 프로골퍼 이지희 "골프는 올라가지 못하면 내려가는 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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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30일 일본 미야자키골프장에서 열린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리코컵 투어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일본의 고가 미호가 4언더파 68타,합계 6언더파 282타로 우승하면서 한국의 이지희(30)는 다 잡았던 시즌 상금왕을 내줘야 했다. 상금 차이는 불과 120만1351엔.이지희가 최종 라운드에서 1타만 줄였어도 한국 선수 최초로 해외 상금왕이 될 수 있었던 경기였다.
간발의 차이로 상금왕을 놓친 이지희는 그러나 소리없이 강하다. 박세리나 김미현처럼 화려한 조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일본 무대에서 꾸준히 입지를 다져왔다. 2000년 프로 데뷔 직후 일본으로 진출한 그는 2001년 JLPGA 신인상 수상에 이어 2003년에는 상금랭킹 2위에 올랐다. 통산 11승.지난해엔 JLPGA 상금왕 2위로 18억여원을 벌었고 '2008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대상' 국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인터뷰를 위해 신문사로 찾아온 그는 담담했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도 사진을 찍을 땐 미소를 잃지 않는 '포토제닉'한 면모도 보였다. 먼저 상금왕을 놓쳐 속상하지 않았는지 물어봤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아깝고 아쉬웠어요. 시나리오도 없었던 그 상황이 너무 극적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막상 그 당시에는 아깝다는 것보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앞섰어요. 내가 무엇이 부족했나,뭘 했어야 했나,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그런 생각들 말이죠.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생각하지 말자고 해도 또 생각이 나고….그러다 좀 안정이 됐는데 12월6일부터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대항전에 오니 하루에도 몇 사람씩 또 물어보는 거예요. 인터뷰도 많았고요. 아예 녹음을 해서 틀어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
▼지금은 좀 안정이 됐나요.
"이제 다 지나고 나니 제가 부족했다는 걸 느껴요. 사실 그렇게까지 올라간 것은 처음인데다 최초의 해외 상금왕이라고 해서 심리적 압박감이 컸어요. 남들 이목이 신경 쓰인다기보다 저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컸다고 할까요. 그런 압박감을 잘 이용해 한 단계 올랐어야 하는데 오히려 압박감에 눌려 있었으니 제가 부족한 탓이죠."▼그래도 2008년은 좋았잖아요. .
"2007년엔 정말 안 좋았는데 그때 인내심을 갖고 연습한 결과가 올해 나온 것 같아요. 작년에는 뭘 해도 다 안 되고 해서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생각하기도 했죠.올해에도 3월 첫 시합에서 예선 탈락해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그러나 '이 고비만 열심히 넘기면 올라가겠지'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낸 것 같아요. 이런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거 같아요. "
▼긍정적인 사고가 많은 도움이 됐군요. ."늘 지금 이 시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골프를 하면서 처음 예선을 통과했을 때,대회에서 1·2등 했을 때 같이 어느 정도 성취하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 가보면 또 올라가야 할 일이 남아있는 거예요. 안 올라가면 남은 건 내려가는 일뿐이니까요. 그러니 지금 이 시점에서 열심히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죠."
▼경기가 잘 안 풀릴 땐 어떻게 합니까.
"우선 다른 사람들의 경기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잘 치고 좋은 플레이를 했는데도 우승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그래서 내 플레이에만 집중하고 만족하자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지희는 서울 반포의 원촌초등학교 6학년 때 집 앞에 골프연습장이 있어서 우연히 골프를 시작했다고 한다. 어릴 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반면 운동은 싫어했다는 설명.주니어 시절엔 골프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으나 세화여고 3학년 때부터 대학 진학을 위해 골프를 열심히 쳤고 이화여대 사회체육학과에 들어갔다. 대학 1학년 때 대학연맹대회에서 처음 우승한 뒤 국가대표로 발탁돼 그해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아마추어 초청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중고생 시절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골프장을 오가며 연습한다고 해서 '독립군'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본인은 이를 탐탁잖게 여긴다. 다른 아이들도 많이 그렇게 했다는 게 이유다.
▼골프를 해보니 적성에 잘 맞던가요.
"잘 맞는다 안 맞는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제가 좀 단순한 편이라 이것저것 좋아하기보다는 하나만 좋아하는 스타일이거든요. 프로 입문 후 일본에 가서 4~5년차쯤 되니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골프가 지겹다거나 선수가 된 걸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나요.
"2007년엔 정말 노력해도 안 되는 건가 싶어서 흥미를 상실한 적도 있죠.그러나 선수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나이가 들고 성적이 올라갈수록 그 자리를 지키려면 더 힘들지만 계속 해야죠.다만 너무 골프에만 몰입해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떨어지지 않나,너무 운동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후회보다는 그런 부족한 부분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
▼그래도 돈을 많이 버니까 좋지 않습니까.
"프로골퍼라는 직업이 좋긴 하죠.선수 생명도 길고요. 인터넷에서 보니까 제가 상금왕 놓쳤다면서 돈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돈 관리할 시간도 없을 뿐더러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선수가 돈에 연연하면 좋을 게 없을 거 같아서 계약금 외에 보너스는 얼마인지도 몰라요. 그냥 재산관리하는 곳에 맡겨서 관리하죠."
▼돈을 많이 쓰나요.
"글쎄요. 일본 진출 후 큰 돈 쓴 거라곤 2007년에 오사카 공항 근처에다 4000만엔 주고 맨션을 산 것밖에 없어요. 그 전에는 내내 월세를 살았고 차는 빌려서 쓰니까요. 그 외에는 크게 쓰는 게 없어요. 다만 대회에서 우승하면 수고한 저 자신에게 명품 가방을 스스로 선물하죠.그래서 가방이 10개 넘어요. 11승했으니까요. 해외 시합에 나가면 끝난 후 쇼핑도 하지만 버는 것에 비해서는 매우 절약하는 편이에요. "
▼왜 일본으로 진출했나요.
"미국과 일본 중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일본에도 대회가 많고,지리적으로 가깝고 음식도 비슷하니까 안정적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자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일본에서 상금왕도 하고 성적도 더 내고 싶어요. 올해에는 미국이나 해외로 나갈 기회도 많으니까 목표는 거기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죠."
▼앞으로의 계획은.
"골프를 하면서 제 노력에 비해 받은 게 더 큰 것 같아요. 성적도,상금도,명예도 말이죠.그래서 내가 받은 걸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지난달 23일 국내에서 처음 자선경매를 했는데 제가 건강하고 또 골프를 열심히 칠 수 있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했어요. 상금왕 2등 해서 아쉽지만 내년 시합에 나갈 수 있고 건강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올해 목표는.
"성적이나 상금보다는 부상 없이 선수로서 지금의 노력을 이어가는 것이 올해 목표예요. 그게 없으면 성적이 날 수도 없고 선수생활을 길게 할 수도 없으니까요. 게을러지지 않도록 애써야죠."이 선수는 "3년 전쯤부터 일본 골프 수준이 많이 상승했다"며 "신진 선수들의 상승세가 엄청나다"고 했다. 하지만 초조감 같은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골프는 다른 사람하고도 상관은 있지만 자기 자신이 얼마나 컨트롤하고 집중하느냐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성적을 내는 것,나를 만족시키는 골프가 중요하다"며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또 올 것"이라고 밝혔다.
글=서화동·한은구/사진=강은구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