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賢人에게 길을 묻다] 가상인터뷰 (3) 레프 톨스토이‥희망 있는한 위기는 스쳐갈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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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순응하라." 레프 톨스토이의 유언은 단 한마디였다.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저작과 교육에 몰두했던 인물 치고는 지나치게 현실사회에 순응하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하루에 8시간 공부하고,8시간 일하고,8시간 잠자는 톨스토이의 바쁜 일상.간신히 시간을 얻자 이것부터 물었다. 남길 말이 이것밖에 없었느냐고….대답은 이랬다. "나도 젊은 시절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위대하며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네.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며 나만의 행복을 좇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결국 인간 존재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다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성사시킨 레닌은 톨스토이를 "혁명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그가 쓴 철학서 소설 종교학서 등이 혁명의 밑거름이 됐다는 뜻에서다. 톨스토이는 수많은 저서를 통해 1800년대 러시아에서 권력자에게만 필요한 법률,부자에게만 유리한 경제 조직,생명이 없는 종교를 있는 그대로 폭로했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급진적인 좌파,사회주의자,혁명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혁명가가 아니야.난 단지 사회 밑바닥에 숨어 있는 죄악들이 불완전한 사회 조직과 불합리한 제도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믿었지.가뭄으로 물 한방울조차 마시기 힘든 농노에게 목욕을 위해 우유를 욕조에 부으라는 사람들이 귀족이었지.이 귀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시 러시아의 사회 제도였어.이런 불합리한 제도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사회적 제도가 문제였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얼핏 개인의 노력을 도외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요. "천만에.그건 아닐세.개인의 노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항상 중요한 것일세.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일수록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네.당신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선두주자인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알고 있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태생적 한계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서양에도 '부자 아이들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 아닙니까.
"그렇지.그래서 난 평생 동안 교육을 중시해왔어.각기 다른 조건을 갖고 태어난 개인들의 출발선 차이를 가장 좁힐 수 있는 방법이 교육이거든.1861년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학교를 세웠지.'야스나야 폴랴나'라는 교육 잡지도 발행했다고.후대에 알려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바보 이반''두 노인' 등의 작품도 교육용으로 쓴 것이야."톨스토이는 동시대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와 곧잘 비교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심리에 깃든 병적이고 모순된 세계를 섬뜩스러울 정도로 해부했다. 반면 톨스토이는 인생의 너저분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인간의 고통은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절망적인 사회를 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선생님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한데요. 자살률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대 사회에도 필요한 힘일 것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은 적이 있나? 난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지리멸렬한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네.그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마 난 '대지'를 중요시하는 농촌 작가라는 점에 있을거야.농촌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계절에 따라 생명이 샘솟는 땅을 보며 자랐지.추운 겨울 꽁꽁 얼었던 땅도 봄이 오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보드랍게 변하거든.인생도 그런 것이야.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터널도 언젠가는 빛을 보게 돼 있거든.따라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어."
▼외람되지만 지금의 삶에 답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진부한 위로가 아닐까요.
"글쎄.진부한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한 것이고,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인 진리일 수 있는 거지.내 이름도 당신네 나라에서 진부하리 만큼 자주 언급되는 걸로 알고 있네.그건 더 나은 삶을 이룩하기 위한 나의 호소가 한 나라,한 사회에 국한되지 않고 만인에게 향한 것이기 때문일 거야."
▼세계가 경제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당장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도 상당한데요.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절망할 필요는 없어.내가 쓴 책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지.'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힘들고 견디기 어렵겠지.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야.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고 개선시키면서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네."
톨스토이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다. 인간이 불화와 위선과 폭력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면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울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토록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면 무조건 서로를 사랑하라는 식의 성경 말씀을 하기보다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했던것 아닙니까.
"이 바보 같은 사람아.이상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이상인 것이야.다만 거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현실 안에서 노력하는 거지.난 국가와 러시아정교회를 부정했어.철저한 무저항주의와 동포주의를 실행하고 일부 기득권층만을 위한 국가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하지만 그것은 이상이었을 뿐이라는 걸 난 알아.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겠지.하지만 유토피아가 멀다고 그 이상까지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유언으로 남기신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순응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렇지.이제야 좀 알아듣는 것 같구먼.난 한국의 젊은이들도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좋겠어.비현실적일 정도로 큰 꿈을 갖되 아주 현실적인 노력들을 끊임없이 하면서 말이야."
▼불행히도 세상의 각박함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바람직한 한국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한국에 국한해서 말하고 싶진 않아.바람직한 진리는 언제 어디에서든 통하게 돼 있지.내 작품 '부활'을 보면 남자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잘못으로 창녀로 변한 옛 연인 카추샤에게 연민을 느끼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부활'하지.카추샤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녀의 아픔을 함께 나누게 된 거야.나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네흘류도프와 카추샤가 됐으면 좋겠어.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곧 서로의 처지에 대한 연민일 수 있거든.서로에 대해 가슴 깊이 공감하고 아파해주는 마음.난 그런 게 온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도움말 주신분=박형규 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참고문헌=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톨스토이 저/이상원 옮김),부활(톨스토이 저/박형규 옮김),톨스토이(인디북 펴냄),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저/권윤정 옮김),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니체(셰스토프 저/이경식 옮김)
● 톨스토이는 누구인가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는 혼란기였다. 제정 러시아의 부패가 하늘을 찔렀다. 톨스토이의 작품이 현실의 냉혹함과 무자비함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게 된 배경이다. 그의 이런 작품세계는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혼란기까지 한국 문단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춘원 이광수는 1923년 톨스토이의 소설 '어둠의 힘'을 번역했다. 춘원의 작품에서는 작법과 문학관,인생관 등 톨스토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톨스토이가 당시 한국인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모든 여건이 혼란스럽던 시기에 확고한 윤리적인 기준과 정신적인 이상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다. 톨스토이는 평생에 걸쳐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설파했다. 그는 기독교 정신을 벗어난 당시의 러시아 정교회,95%의 부를 점유하고 살아가던 5%의 귀족,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법과 사회 제도 등에 신물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독자적으로 러시아 국민을 위한 정신적인 기준과 문화,사회 제도,종교관을 제시했다.
그가 남긴 저서도 방대하다. 러시아의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에서는 이미 90권짜리 톨스토이 전집을 냈다. 각 권마다 원고지 4000~5000장 분량이다. 장르도 다양해 문학에서부터 철학 종교 교육 등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부인 소피아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1910년 82세의 나이에 집을 나간다. 한 달 뒤 랴쟌 우라르 철도의 아스타포보 역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맨몸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그의 유지에 따라 무덤에는 그 흔한 비석 하나 없다.
● 연보
△1828년,러시아 모스크바 남쪽의 야스나야폴랴나에서 출생△1847년,카잔대학 중퇴
△1852년,처녀작 '유년시대' 익명으로 발표
△1862년,궁정 시의(侍醫)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
△1864~1869년 '전쟁과 평화' 집필
△1873~1876년,'안나 카레니나' 집필
△1899년,'부활' 출간
△1910년,아스타포보역(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객사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성사시킨 레닌은 톨스토이를 "혁명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그가 쓴 철학서 소설 종교학서 등이 혁명의 밑거름이 됐다는 뜻에서다. 톨스토이는 수많은 저서를 통해 1800년대 러시아에서 권력자에게만 필요한 법률,부자에게만 유리한 경제 조직,생명이 없는 종교를 있는 그대로 폭로했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급진적인 좌파,사회주의자,혁명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나는 혁명가가 아니야.난 단지 사회 밑바닥에 숨어 있는 죄악들이 불완전한 사회 조직과 불합리한 제도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믿었지.가뭄으로 물 한방울조차 마시기 힘든 농노에게 목욕을 위해 우유를 욕조에 부으라는 사람들이 귀족이었지.이 귀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시 러시아의 사회 제도였어.이런 불합리한 제도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사회적 제도가 문제였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얼핏 개인의 노력을 도외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요. "천만에.그건 아닐세.개인의 노력은 시대를 뛰어넘어 항상 중요한 것일세.노력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일수록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네.당신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선두주자인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알고 있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태생적 한계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서양에도 '부자 아이들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 아닙니까.
"그렇지.그래서 난 평생 동안 교육을 중시해왔어.각기 다른 조건을 갖고 태어난 개인들의 출발선 차이를 가장 좁힐 수 있는 방법이 교육이거든.1861년 고향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학교를 세웠지.'야스나야 폴랴나'라는 교육 잡지도 발행했다고.후대에 알려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바보 이반''두 노인' 등의 작품도 교육용으로 쓴 것이야."톨스토이는 동시대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와 곧잘 비교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 심리에 깃든 병적이고 모순된 세계를 섬뜩스러울 정도로 해부했다. 반면 톨스토이는 인생의 너저분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인간의 고통은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절망적인 사회를 보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선생님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한데요. 자살률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대 사회에도 필요한 힘일 것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은 적이 있나? 난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지리멸렬한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네.그와 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마 난 '대지'를 중요시하는 농촌 작가라는 점에 있을거야.농촌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계절에 따라 생명이 샘솟는 땅을 보며 자랐지.추운 겨울 꽁꽁 얼었던 땅도 봄이 오면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보드랍게 변하거든.인생도 그런 것이야.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터널도 언젠가는 빛을 보게 돼 있거든.따라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어."
▼외람되지만 지금의 삶에 답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진부한 위로가 아닐까요.
"글쎄.진부한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한 것이고,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인 진리일 수 있는 거지.내 이름도 당신네 나라에서 진부하리 만큼 자주 언급되는 걸로 알고 있네.그건 더 나은 삶을 이룩하기 위한 나의 호소가 한 나라,한 사회에 국한되지 않고 만인에게 향한 것이기 때문일 거야."
▼세계가 경제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당장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며 절망에 빠진 사람들도 상당한데요.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절망할 필요는 없어.내가 쓴 책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지.'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힘들고 견디기 어렵겠지.하지만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야.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고 개선시키면서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네."
톨스토이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다. 인간이 불화와 위선과 폭력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면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울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토록 사회를 바꾸고 싶었다면 무조건 서로를 사랑하라는 식의 성경 말씀을 하기보다 좀 더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했던것 아닙니까.
"이 바보 같은 사람아.이상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이상인 것이야.다만 거기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현실 안에서 노력하는 거지.난 국가와 러시아정교회를 부정했어.철저한 무저항주의와 동포주의를 실행하고 일부 기득권층만을 위한 국가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하지만 그것은 이상이었을 뿐이라는 걸 난 알아.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겠지.하지만 유토피아가 멀다고 그 이상까지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유언으로 남기신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순응하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렇지.이제야 좀 알아듣는 것 같구먼.난 한국의 젊은이들도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면 좋겠어.비현실적일 정도로 큰 꿈을 갖되 아주 현실적인 노력들을 끊임없이 하면서 말이야."
▼불행히도 세상의 각박함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바람직한 한국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한국에 국한해서 말하고 싶진 않아.바람직한 진리는 언제 어디에서든 통하게 돼 있지.내 작품 '부활'을 보면 남자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잘못으로 창녀로 변한 옛 연인 카추샤에게 연민을 느끼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부활'하지.카추샤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녀의 아픔을 함께 나누게 된 거야.나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네흘류도프와 카추샤가 됐으면 좋겠어.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곧 서로의 처지에 대한 연민일 수 있거든.서로에 대해 가슴 깊이 공감하고 아파해주는 마음.난 그런 게 온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도움말 주신분=박형규 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참고문헌=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톨스토이 저/이상원 옮김),부활(톨스토이 저/박형규 옮김),톨스토이(인디북 펴냄),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저/권윤정 옮김),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니체(셰스토프 저/이경식 옮김)
● 톨스토이는 누구인가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대는 혼란기였다. 제정 러시아의 부패가 하늘을 찔렀다. 톨스토이의 작품이 현실의 냉혹함과 무자비함을 있는 그대로 고발하게 된 배경이다. 그의 이런 작품세계는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혼란기까지 한국 문단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춘원 이광수는 1923년 톨스토이의 소설 '어둠의 힘'을 번역했다. 춘원의 작품에서는 작법과 문학관,인생관 등 톨스토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톨스토이가 당시 한국인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은 모든 여건이 혼란스럽던 시기에 확고한 윤리적인 기준과 정신적인 이상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렇다. 톨스토이는 평생에 걸쳐 인류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설파했다. 그는 기독교 정신을 벗어난 당시의 러시아 정교회,95%의 부를 점유하고 살아가던 5%의 귀족,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법과 사회 제도 등에 신물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독자적으로 러시아 국민을 위한 정신적인 기준과 문화,사회 제도,종교관을 제시했다.
그가 남긴 저서도 방대하다. 러시아의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에서는 이미 90권짜리 톨스토이 전집을 냈다. 각 권마다 원고지 4000~5000장 분량이다. 장르도 다양해 문학에서부터 철학 종교 교육 등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는 문제로 끊임없이 부인 소피아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1910년 82세의 나이에 집을 나간다. 한 달 뒤 랴쟌 우라르 철도의 아스타포보 역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맨몸 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길 원했던 그의 유지에 따라 무덤에는 그 흔한 비석 하나 없다.
● 연보
△1828년,러시아 모스크바 남쪽의 야스나야폴랴나에서 출생△1847년,카잔대학 중퇴
△1852년,처녀작 '유년시대' 익명으로 발표
△1862년,궁정 시의(侍醫)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
△1864~1869년 '전쟁과 평화' 집필
△1873~1876년,'안나 카레니나' 집필
△1899년,'부활' 출간
△1910년,아스타포보역(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