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신드롬 ‘진실 혹은 거짓’
입력
수정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 있는데 “혈액형이 뭐예요?”라는 말이다. 평소 혈액형에 대해 그닥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O형은 마음이 넓고 통이 크다던데..”라고 말하면 나도 모르게 귀를 세우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지난 몇 년 사이 한국의 잡지, TV쇼, 인터넷 채팅방 등에서는 혈액형이 주요 화제로 등장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혈액형을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사가 되었고 우연히 같은 혈액형을 만나기라도 하면 마치 오랜 동료나 친구와 재회하듯이 반가워하며 친밀감을 유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혈액형은 A, B, O. AB 대략 네 가지로 구분되어 있어 대화를 풀어나가기에 유용하고 또한 이에 근거한 성격에 대한 평가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무슨 말을 해도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혈액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혈액형과 성격 그리고 수많은 속설들이 마치 진실처럼 포장되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혈액형에 대해 추상적이고도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특히 “혈액형을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라고 할 정도로 혈액형을 4가지로 단순화하여 그 성향과 특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많다. 그래서 각종 인터넷, 잡지, TV에서 말하는 혈액형별 특징을 살펴보면
원리원칙주의자 혹은 완전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다. 책임감이 강해 조직 내에서 신뢰를 받는 편이나 과한 신중함 때문에 때로는 융통성이 없다는 평도 듣는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낯가림이 심하나 연애할 때는 의외의 대담성을 보일 수 있다.
호기심이 왕성해 항상 화제가 풍부하고 창조력이 넘쳐난다. 그러나 집중력이 약해 조직 활동보다는 프리랜서가 더 어울린다. 인정이 많고 배려심이 많지만 때론 참견이 심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성격이 활달해 항상 분주히 무언가를 하는 편이다.
성격적으로 인간미가 있고 행동은 목적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정열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며, 동료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집단내에서는 리더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현실과 이상을 확실히 구분하며 승부욕이 강하다.
A형과 B형이 어우러져 한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타입이다. 때로는 우유분단한 면도 보이지만 어떤 일이라도 요령 있게 대처하며 객관적 판단에 근거한 행동으로 실수가 적다.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을 하며 사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비밀이 많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위와 같은 혈액형별 성격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의 성격상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특징들을 기술해 놓았는데 사람의 특징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라야 객관적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만약에 O형은 무난하고 AB형은 괴짜라는 식으로 사람을 손쉽게 판별한다면 우리는 혈액형별 성격에 대해 선입견을 지니게 되어 사람을 대할 때 자신도 모르게 행동부터 바뀌게 된다.
“누구님은 혈액형이 뭐예요?
“AB형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데...”
이처럼 한 인간에 대한 특성을 다각도가 아닌 몇몇 특징으로 단정 지어서 결과적으로 그러한 신념이 상대방의 행동을 유도하게 되고 경계심을 가져 대인관계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요즘 가장 관심을 받은 주제는 ‘B형 남자 담론’. B형 남자는 이기적이고 빨리 변한다고 믿어 B형 남자와 연애하지 않겠다는 미혼남녀가 적지 않다. 이와 같은 경우는 단순히 영화의 소재로 웃어넘기거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문제는 재미로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물 기준 잣대로 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요즘 특정 혈액형은 입사지원 자체를 받지 않는 기업까지 생겨났다. 이력서에 혈액형을 기재하도록 하고 면접 시에 혈액형을 묻는 일까지 발생한다. 또한 혈액형을 기준으로 직업을 바꾸고 초등학생 아이가 혈액형으로 왕따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며 혈액형 궁합의 유행으로 ‘A형과 잘 맞는 혈액형’, ‘O형과 A형의 궁합은’라는 식으로 연애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렇듯 대화의 재미소재를 넘어서 맹목적인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혈액형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에 새삼 놀라기도 했지만 여전히 감춰져 있는 혈액형 성격학의 왜곡 뒤에 감춰진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이 들어 혈액형 성격학의 탄생배경을 더듬어 본다.
혈액형은 원래 20C 초의 유럽에서 시작된 황화론을 근거로 하는 우생학에서 탄생했다. 이러한 이론들은 주로 백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려 한 것들이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지금 많이 알려진 혈액형을 도입했다. 서양은 O형과 A형이 90%를 차지하고 있고 동양 사람에 B형이 많은 점을 감안해서 더러워지지 않은 순수 유럽 민족, 즉 게르만 민족의 피가 A형이고 그 대척점에 있는 B형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아시아 인종에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우생학의 근저에는 B형 열등론 즉 황인종의 열등론이 깔려있다. 혈액형 성격의 최초의 연구자는 1910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재직하던 에밀 폰 듄게른 박사로서 그는 인간의 우열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6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온 일본인 의사 키마타 하라는 혈액형과 성격을 연결시키려는 조사 논문을 발표하고 이어서 일본인 의사 하라키마타가 일본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혈액형과 성격을 언급하면서 혈액형 성격학이 탄행하게 된 것이다. 그 영향을 받아 동경여자사범학교의 강사로 있던 후루카와 타게지가 일본에서 성격 분석표 등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논문을 냈는데 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것이 혈액형에 대해 높은 관심을 불러켜 이것에 자극을 받아 노미 마사히코의 이 열풍을 다시금 부활시켰다.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혈액형의 구분 기준이었던 ‘우열’을 ‘성격’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고 이러한 이론이 우리나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 결과 ‘황인종은 진화가 덜 되었다’는 관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작된 우생학적 이론이 성격으로 포장되어 지금의 혈액형과 성격이라는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혈액형 성격학을 사회심리에 얽힌 현상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통 막연하고 일반적인 특성을 자신의 성격으로 묘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특성이 있는지의 여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으로 믿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처럼 착각에 의해 주관적으로 끌어다 붙이거나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을 일명 ‘바넘효과’ 또는 ‘포러효과’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자기 충족적 예언’에 의해서 객관적이지 않는 잣대가 그럴듯하게 재포장되어 인식되고 있다고 말한다.
위와 같은 주장에서 보듯이 아무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혈액형 성격학으로 인간의 성격을 구분하고 분석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혈액형의 신드롬을 탄생배경의 진실과 여러 인간심리학을 설명한다해도 이같은 열풍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이용해 좀 더 좋은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마음가짐에 있다고 생각된다. 혈액형 성격학으로 우열을 구분하는 것보다는 그냥 재미로 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나의 첨가제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익경기자 ikjang@wowtv.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