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인사이드] '실물' 지피라고 한은서 푼돈이 MMF에 뭉칫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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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시장 안정위해 달러 팔자금융위기 국면을 맞아 하루만 맡겨도 연 3% 수준의 수익을 주는 대표적인 단기투자 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가 블랙홀처럼 시중 부동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작년 4분기부터 거침없는 증가세를 보이더니 연초에 설정액 100조원을 단숨에 돌파하고 연일 사상 최대 기록을 쓰고 있다. 지난해 10월 말 이후 3개월여 동안 유입된 돈은 41조원으로 월평균 10조원을 웃돈다. 특히 올 들어선 하루 1조원씩의 뭉칫돈이 들어오는 등 자금유입 속도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더 가팔라졌다. 이 같은 자금집중 현상은 불안한 금융시장의 흐름을 보여주는 단면으로 꼽힌다. 일시적인 여유자금을 단기로 굴리는 상품이기 때문에 과도한 자금유입은 변동성과 불확실성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막대한 원화자금 들어오기도
올들어 하루 1조원씩 유입
◆유동성 공급 · 환율 방어가 주요인
시중에는 돈이 돌지 않아 아우성인데 MMF로 몰리는 뭉칫돈은 어디서 온 것일까.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 부동자금이 이 상품을 피난처로 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보다는 신용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한국은행 등 금융당국에서 대량으로 푼 자금이 금융과 실물시장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고 MMF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은이 돈을 풀기 위해 요즘 실시하는 연 2.5%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싼 자금을 확보한 은행이나 증권사가 이 자금으로 짭짤한 이자를 주는 MMF에 넣어 안전하게 차익을 얻고 있다는 분석이다.
또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도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외환당국이 원 · 달러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팔아 유입되는 막대한 원화자금이 이 상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진단이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채권부문 대표는 "정부는 외환시장 개입으로 보유하게 된 원화를 '연기금 풀'에 집어넣어 운용한다"며 "이런 방식으로 유입된 돈이 MMF 증가분의 절반을 넘을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연기금 풀의 자금집행을 대행하는 주관운용사인 삼성투신운용의 MMF 잔액이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잦았던 작년 10~12월 중 19조원이나 급증한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기업들이 급속한 경기둔화에 대비해 확보한 현금을 이 상품에 넣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규모가 크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최진영 미래에셋자산운용 과장은 "기업의 여유자금이 일부 유입될 수도 있겠지만 고금리로 조달한 자금을 그보다 이자가 낮은 MMF에 맡겨둘 이유는 없다"고 설명했다.
◆상대적 고금리와 안정성이 매력
이 상품 말고도 단기자금을 운용할 수 있는 투자수단은 많다. 은행권에선 '수시입출금식 예금'(MMDA)과 요구불예금이 있고 증권사 상품 중에서도 종합자산관리계좌(CMA)와 RP 등이 경쟁한다. 하지만 MMF를 제외하고는 자금유입이 두드러진 상품이 없다는 점이 특이한 현상이다. 이 상품이 인기를 끄는 것은 은행권 못지 않은 안정성에다 최근 금리급락기를 맞아 상대적으로 고금리 매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MMF는 판매하는 증권사나 은행마다 보통 3.5~4.0%(1개월 세후 기준)의 이자를 준다. 반면 은행상품인 MMDA 금리는 2% 초반에 불과하고,은행 요구불예금도 큰 이자를 기대하기 힘들다. 증권사 경쟁상품인 CMA나 RP에 비해서는 안정성이 높은 게 장점이다. CMA는 월급통장처럼 쓸 수 있는 등 여러 부가기능이 있지만,신용등급 'AA'급 이상인 회사채나 국공채에 투자하는 MMF와 달리 'BBB'급도 편입하는 등 안정성 측면에서 뒤진다는 평가다.
RP는 이자 면에서는 뒤지지 않지만,증권사들은 최근 역마진 때문에 RP 판매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다. 은행채 1년물 수익률이 3%에 못 미치고 있어 3.5~3.9% 정도의 확정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RP를 판매하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반면 MMF는 채권값을 장부가로 평가하는 것이 금리하락기를 맞아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경신 대신투신운용 채권운용팀장은 "고금리 시절에 높은 이율(싼 가격)로 편입한 채권에서 여전히 이익이 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금리를 줄 수 있어 지금과 같은 금리급락기에는 MMF가 돋보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증시로 자금이동 기대는 무리
MMF로 자금이 몰린 것이 금융시장 전체로 볼 때 썩 반가운 일은 아니다. 단기부동화를 심화시켜 금융시장 불안정을 증폭시킬 수 있어서다. 하지만 역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기운용이 목적이지만 이 상품에 들어온 돈도 결국 어디엔가 투자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상품은 최근 국공채는 물론 양도성예금증서(CD)나 기업어음(CP) 등에 대규모로 투자되고 있고 이는 금리인하로 이어지고 있다. 이동근 삼성투신운용 채권팀장은 "작년 말부터 CD 금리가 추락하기 시작하고 연초부터 CP 금리가 성큼성큼 떨어진 데는 MMF의 기여가 컸다"고 진단했다. 최진영 과장은 "정부가 유동성 확대 정책의 목표로 삼고 있는 실물경제로의 자금 공급이 결국 MMF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셈"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속성상 단기상품에 주로 투자하다보니 회사채와 같은 장기시장으로는 아직 돈이 돌지 못해 신용경색을 푸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황금단 삼성증권 연구원은 "MMF의 투자로 촉발된 단기자금 시장의 온기가 점차 장기 '크레디트물' 활성화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또 증시 일각에서는 금융시장이 안정돼 위험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질 경우 MMF에 머물고 있는 돈이 조만간 증시로 대거 유입될 것이란 기대가 나오고 있지만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다. 김경록 대표는 "증시유입이 가능한 개인 MMF 자금은 거의 늘지 않았다"며 "법인 MMF 자금이 대규모로 증시로 유입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백광엽 기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