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청혼

1975년 가을,힐러리 로댐은 빌 클린턴의 곁을 떠나 여행을 떠났다. 하원의원 선거에 떨어진 빌이 아칸소 주정부에 진출하겠다고 나선 뒤였다. 힐러리는 빌을 사랑했지만 결혼은 망설이고 있었다. 빌의 복잡한 여자관계와 결혼하면 아칸소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빌 또한 힐러리와의 관계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힐러리가 떠난 뒤 괴로워하던 빌은 그녀가 돌아오던 날 공항에 나가 말했다. "공항 오는 길가에 있는 빨간 벽돌집 봤어? 내가 그 집을 샀어.이제 나랑 결혼하는 게 좋을 거야.그 집에서 나 혼자 살 순 없으니까 말이야."칼 번스타인이 펴낸 '힐러리의 삶'에 따르면 힐러리는 빌의 이 청혼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돼 있다. 둘은 그해 10월11일,빌이 계약금 3000달러에 매달 174달러씩 붓기로 하고 구입한 93㎡짜리 집(총액은 2만달러) 거실에서 가족에게 물려받은 반지를 교환하면서 결혼했다.

결혼한 지 20년이 채 안돼 미국 대통령이 된 남자의 청혼엔 이벤트도 큼지막한 반지도 없었다. 어디 그들 뿐이랴.이 땅의 나이든 부부 대부분은 청혼이란 절차가 따로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뭐든 달라지는 법.요즘 젊은층 사이에선 특별하고 감동적인 청혼 이벤트가 유행처럼 번진다.

방법도 가지가지.영화 '스파이더맨 3'의 주인공처럼 와인잔에 반지를 넣기도 하고,레스토랑 무대에 올라 편지를 낭송하거나 어두운 아이스링크나 공원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 순간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다. 거리의 전광판과 청계천 두물다리 아래 설치된 청혼의 벽을 이용,공개 구혼도 한다.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TV의 짝짓기 프로그램 등에서 온갖 이벤트성 청혼 장면을 내보내다 보니 어지간한 방법으론 감동시키기도 어렵다는 마당이다. 깜짝 놀랄 만한 방식의 청혼을 받으면 기쁘고 황홀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동화나 연속극에서처럼 사랑의 종착역이 아니라 시발점이다.

결혼에 대한 결심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전제돼야 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기발한 청혼 이벤트보다 건강한 가치관과 성실한 태도,상대의 마음과 처지를 헤아리고 배려하는 자세에 더 많은 점수를 줘야 마땅하다. 그래야 사는 내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