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한 中企사장의 '은행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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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기 경제부 기자 sglee@hankyung.comA사는 지난달 중순 스페인의 한 회사와 어렵사리 수출계약을 맺었다. 회사 설립 후 1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성사시킨 거래였다. 현지 은행이 64만유로의 거래대금 지급을 보증한다는 신용장(LC)까지 발급했다.
거래업체에서 LC를 받은 이 회사 홍모 사장은 한달음에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사기 위해 LC네고를 하려고 거래 은행을 찾았다. 하지만 수출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단번에 거절당했다. 이 때부터 홍사장의 고통스런 은행 순례가 시작됐다. 전 시중은행을 찾아 다녔고,모든 은행에서 똑같이 "업력(業歷)이 짧고,무역 실적이 전무해서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은행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홍 사장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신용보증기금.무역거래가 이뤄져 LC를 받았는데 제품 선적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니 보증서를 발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신보 역시 보기 좋게 퇴짜를 놓았다. 거부 사유도 은행과 다르지 않았다. "경영 이력이 짧고 실적이 적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힌 홍 사장은 중소기업진흥공단,수출보험공사까지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기자가 한 종합상사에 "스페인 은행의 LC네고를 거부당한 전례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LC는 말 그대로 거래업체의 은행이 그 기업의 신용도를 평가해 대금을 지급해주겠다는 보증을 해 준 것으로 LC를 받은 회사의 신용도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담보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LC 자체가 담보가 되는데 거기서 또 담보를 요구한다면 국제거래에서 LC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부는 수출 계약서만 가지고 오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할 테니 100% 대출을 하라고 하지만 신용장을 보여줘도 정부 보증기관조차 보증서 발급을 거절하는 게 현실이다. 정책 발표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홍 사장은 "은행과 보증기관을 찾아다니는 데만 한 달을 허송세월했다"며 "이제 정말 선적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울상을 지었다.
17일 여의도 국회에서는 경제부처 장관을 다그치는 여야 의원들의 어수선한 대정부 질의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말의 성찬보다는 작지만 구체적인 실천과 점검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