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 복귀·서열 파괴…日기업은 '인사혁명중'

스트링거 소니 회장 "사장 겸직"…젊은간부 대거 중용
도요타 등 창업자 경영참여…'강한 CEO'로 위기돌파
지난달 27일 오후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소니 본사 2층 강당.30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모인 긴급 기자회견에서 하워드 스트링거 소니 회장(67)은 "4월1일부터 옆에 앉아 있는 주바치 료지 사장이 상담역으로 물러나고,내가 사장을 겸직하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는 "나와 사업본부장 사이에 사장 부사장 등 관료적 단계를 없애는 것"이라며 앞으로 일선 사업을 직접 챙기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경영 전권을 장악한 스트링거 회장은 4개 사업본부의 책임자 4명 중 3명을 40대 젊은 간부로 발탁하기도 했다.

인사에 관한 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기업들이 '혁명적 인사'를 단행하고 있다. 최고경영진을 단칼에 날리고,연공서열을 무시하는 '관행 파괴 인사'를 진행 중이다. 세계 동시 불황과 엔고로 사상 초유의 경영난에 직면한 일본 기업들이 인사 혁신으로 위기를 돌파하려는 모습이다. 최근 일본 간판 기업들의 인사 혁신 공통점은 '강한 사장'을 내세우기 위해 과감하게 최고경영자를 교체한다는 것이다. 도요타자동차가 2차대전 이후 첫 영업적자 위기를 맞아 창업가 직계의 도요다 아키오 부사장을 6월 말 사장으로 승진시키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그는 올해 52세로 '일본 최대 기업을 책임지기에는 어리지 않으냐'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조 후지오 회장은 "창업자의 손자라는 상징성으로 그룹 내 구심력을 높일 수 있는 데다 젊은 패기가 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2000년 회장으로 물러났던 경차업체 스즈키의 오너 스즈키 오사무 회장(78)이 작년 말 이례적으로 사장직에 재등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너 경영자의 카리스마를 위기 극복에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2위 자동차회사인 혼다는 올 6월 말 주총에서 후쿠이 다케오 사장(64)이 물러나고 이토 다케노부 전무(55)가 사장에 오를 예정이다. 이토 신임 사장은 혼다기술연구소 사장도 겸임한다는 게 특징이다. '기술의 혼다'라는 명성을 회복해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토 전무의 승진과 동시에 혼다는 상담역 전무 감사 상무 등 경영진 4명을 퇴진시키기로 했다. 임원 인사에서도 연공서열을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 연공서열을 대신한 원칙은 '능력'이다. 히타치제작소는 요시가와 가즈오 사장의 1년 선배이자 HDD(하드디스크드라이버) 자회사 사장인 나카니시 히로아키 사장을 최근 본사 부사장으로 발령했다. 일본 기업에서 자회사 사장으로 나가면 퇴직 수순을 밟는 것이란 점에서 이례적 조치였다. 자회사에서 구조조정 실적을 인정받은 게 인사의 배경이란 후문이다.

도요타가 이미 퇴임해 주부국제공항 사장을 맡고 있는 이나바 요시미 전 부사장을 다시 부사장으로 불러들인 것도 능력 중시 인사의 사례다. 이 밖에 주요 기업들이 지난해 말부터 종신고용 전통을 사실상 포기하고,수천명에서 수만명씩 직원을 해고하고 있는 것도 인사 혁명의 또 다른 단면이다. 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 박사는 "일본 기업의 신임 사장 취임사에서 고정 레퍼토리였던 '전임 사장의 경영 방침을 잘 받들어'란 말은 이제 사라지게 됐다"며 "관행을 뒤집은 인사 혁명이 성공할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밝혔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