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 韓 대사님, 랩터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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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김홍열 comeon@hankyung.com한덕수 신임 주미대사님,요즈음 워싱턴 정가와 미국민들을 향해 '랩터'를 살려둬야 한다는 기업들의 호소가 눈물겹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랩터의 딱한 사정을 봅니다. 하루는 시카고 주물 공장에서,다음 날은 오하이오 티타늄강판 공장에서,또 하루는 코네티컷 조립공장에서 랩터는 살려달라고 절박한 울음소리를 냅니다. 워싱턴포스트와 정치전문지인 폴리티코의 전면 컬러 광고를 통해서지요.
본래 독수리 매 등 맹금류를 뜻하는 '랩터(Raptor)'는 미 공군이 2005년 도입한 차세대 전투기 F-22의 별칭입니다. 적의 레이더를 피할 수 있도록 스텔스 기능을 갖춘,공중전에서는 맞상대가 없는 세계 최강의 전투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9월 현재 모두 127대가 생산됐습니다. 1대 가격이 무려 1억3800만달러입니다. 미 국방부가 애초 책정한 랩터 프로젝트 예산은 650억달러에 달합니다. 이런 랩터가 경제난에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오바마 새 정부는 사업규모를 대폭 축소하거나,아예 사업을 중단하는 쪽을 놓고 저울질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눈여겨보는 것은 랩터 주사업체인 록히드마틴과 부사업체인 보잉이 국민들과 정가에 전달하는 광고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는 최첨단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랩터를 날게 해 달라는 요구와 거리가 멉니다. 매번 일터 근로자들의 사진과 근심걱정 멘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시카고 오하이오 코네티컷 등 미 전역에서 랩터 자재와 부품을 생산하고 조립하는 9만5000명의 밥줄이 걸려 있다고 호소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0년까지 7870억달러를 쏟아부어 350만개 일자리를 지켜내거나 새로 창출하는 데 정권의 명운을 걸겠다고 천명했습니다. 천문학적인 재정적자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상 최대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는 만큼 어수룩할 순 없습니다. 인터넷 정책홍보 사이트(www.recovery.gov)는 오하이오주 13만3000명,하와이주 1만5000명 등 미국 51개주의 일자리 보존 · 창출 예상지도까지 만들어 국민들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록히드마틴과 보잉이 전개하고 있는 체감도 높은 랩터 살리기 노력은 오바마 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전쟁을 역이용한 것이지요. 정곡을 찌른 접근입니다. 랩터 예산을 절감하는 게 바람직한 정책인지,랩터 일자리를 지켜주는 게 유리한 정책인지 논란이 가열되고 있습니다. CNN방송은 랩터를 살리자고 서명한 연방의원들이 100명을 넘어섰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랩터의 울음은 보다 정교해지고 보다 거세질 것으로 보입니다.
한 대사님.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 문제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다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그는 국내 경제난 해결에 눈코뜰새 없는 데다 협정 자체에 불만이 많습니다.
우리도 한 · 미 FTA의 조속한 비준이 가져다주는 미국 내 일자리 창출 기여도를 구체적 수치로 제시하면서 오바마 정부에 세일즈를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 · 미 FTA 전도사'께서 조만간 워싱턴에 부임하신다기에 랩터 이야기로 미리 인사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