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기자의 역사책 읽기] 원더걸스 잡는 것은 소녀시대… 여자 라이벌과 맞선 여성지도자

‘꿩 잡는게 매’라는 말이 있듯 각각의 존재에는 천적이 있기 마련이다.

종종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는’ 라이벌은 비슷한 특성과 장점을 가진 경우가 있다. 때론 이 같은 비슷한 특성 때문에 라이벌이 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젊은 여성 그룹이라는 특성을 지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태생적으로 라이벌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다. 여성그룹 원더걸스는 빅뱅, 동방신기 등 남성그룹과는 보완적 관계가 될 수 있지만 같은 여성 그룹으로 같은 시장을 놓고 격돌하는 소녀시대와는 대체적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

우연찮게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전통시대에 여성으로서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 ‘여성’ 경쟁자들과 생사를 건 사투를 했던 인물이 있다. 원더걸스 대 소녀시대의 대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파란만장한 ‘여성 대 여성’의 대결을 이어간 주인공은 바로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다.


“국가와 결혼했다”는 엘리자베스1세는 영국인들에게 영광스런 제국의 시작을 연상케 하는 인물.하지만 여왕의 화려한 명성 이면에는 신구교간의 갈등을 무마시켜야 했고 즉위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왕권을 위협받으며 왕위를 전복하려는 음모가 적발됐던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치열한 투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대 박지향 교수의 평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축복이 아니라 실망과 질시 속에서 태어나”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헨리8세는 딸 메리만을 둔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했지만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지 못하고 딸 엘리자베스만을 둔다. 하지만 헨리8세는 엘리자베스가 3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 앤을 간통죄로 몰아 처형하게 된다. 앤은 자신의 오빠를 포함해 다섯 명의 남자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처형되고 사람들은 앤을 ‘창녀’나 ‘매춘부’라고 부르며 비난하는 상황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지위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 엘리자베스는 어려서 적자와 서자의 위치를 계속해서 오갔다.

원래 헨리8세가 정한 왕위계승 서열은 세 번째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인 에드워드가 최우선이고 에드워드가 후사가 없을 때 첫 번째 왕비소생인 메리가, 메리마저 후사가 없을 때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식이었다. 사실상 엘리자베스에겐 왕위 계승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셈.

하지만 에드워드가 10세에 즉위해 6년만에 사망하자 당시 실권자였던 노섬벌랜드 공작은 카톨릭 교도인 메리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꺼려해 자신의 며느리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를 에드워드의 후계자로 만드는 음모를 꾸민다. 노섬벌랜드 공작의 이같은 시도는 메리의 반격으로 좌절되고 메리가 런던에 입성하면서 제인 그레이와 노섬벌랜드 공작은 4일간의 짧은 집권을 마치게 된다. 이어 5일후 이들은 처형된다. 이복 언니인 메리 여왕이 등극하자 엘리자베스는 본격적으로 생명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 메리 여왕의 치세(1555-1558)동안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쓰고 2개월간 런던탑에 갇히기도 한 것. 해명할 기회도 없이 반역 혐의를 뒤집어 쓰고 생명의 위협을 받자 엘리자베스는 메리에게 “판단을 재고해 달라”는 간청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쉰 목소리의 남자 같은 음성을 지녔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외모를 지녔다던 메리는 이복 자매인 엘리자베스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당대 잉글랜드에 체류중이던 베네치아 외교관은 “메리는 엘리자베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인을 보여줬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왕위 계승권을 지닌 잠재적 경쟁자인데다 종교마저 신교도인 엘리자베스는 구교도인 메리에게 여러모로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던 것. 카톨릭 교도로 자란 메리는 어머니를 폐비시킨 신교세력을 저주했고 로마카톨릭을 국교로 부활하려 시도했다. 라틴어 미사를 부활했으며 사촌인 에스파냐 펠리페와 결혼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잉글랜드를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에 종속시킬 가능성으로 비쳐졌고 메리가 결혼을 강행하면서 신교도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됐다.

사료의 특성상 메리에게 부정적인 묘사 위주이긴 하지만 메리 치세 4년간 300여명이 이단으로 처형돼(정확히는 1555년 2월 이후 최소 287명) 메리 여왕은 ‘블러디 메리(지금은 칵테일 이름으로 더 잘 남아있다.)’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이 시기에 헨리8세 때의 캔터베리 대주교로 헨리8세와 메리의 어머니인 캐더린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던 크랜머와 후퍼주교, 리들리 주교, 래티머 주교 등 신교지도자들이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엘리자베스는 이복언니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살아남는다.

이어 (엘리자베스에겐 행운으로) 메리가 후사없이 죽게 되면서 25세의 젊은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오르며 첫 여성 라이벌과의 대결에서 살아남게 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앞에 또다시 메리란 이름을 가진 다른 여성이 앞길을 가로막는데 바로 헨리8세의 누이인 마거리트의 손녀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2차 여성대전의 주인공이다.

생후 1주일만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에서 자라 그곳에서 결혼하는데 남편 프랑수아2세가 요절하자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후진지역이던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처음부터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닌데 실제 메리가 스코틀랜드에 귀국한 뒤 엘리자베스에게 친구가 되길 원한다고 천명하기도 한다. 당시 메리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모두 같은 섬에 살고 있고 같은 언어를 쓰며 가까운 친척여인들이며 그리고 모두 여왕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사촌인 헨리 스튜어트 단리 백작과 결혼해 아들을 낳는데 잉글랜드 왕실 혈통이었던 단리의 아들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메리는 바람이 나서 단리를 살해하게 되고 스코틀랜드 신민들은 여왕의 이같은 행동을 용납하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고 메리를 감금하게 된다. 메리는 1살짜리 아들 제임스에게 양위를 강요당한다. 이듬해 감옥을 탈출한 메리는 잉글랜드로 도주하게 된다.

잉글랜드로 도망온 잠재적 왕위경쟁자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사실상 감금형태로 라이벌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헨리7세의 증손녀로 엘리자베스와 오촌간이며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메리는 잉글랜드내 카톨릭교도와 반체제파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으며 엘리자베스를 위협하게 된다.

이같은 정치적 배경외에 두 여인 사이의 시기심도 두사람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스코틀랜드의 메리는 남아있는 초상화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상당한 미인으로 알려졌고 이점을 엘리자베스 여왕이 무척 시기했다는 것.

엘리자베스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메리중 누가 더 예쁜가”를 묻기도 했고, 일부 눈치없는 신료들이 “메리가 더 예쁘다”고 대답해 매우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엘리자베스가 이복동생인 에드워드6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마도 자랑스럽게 내밀 얼굴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만은 내놓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묘사한 것을 보면 미인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는게 일반적인 평이다.

여기에 두 사람간의 관계가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는 데는 당시의 국제관계가 촉매역할을 했다. 유럽전역이 종교문제로 둘로 나뉘면서 개신교의 챔피언격인 잉글랜드가 더욱 주목됐고 1568년 잉글랜드가 네덜란드로 항해중이던 펠리페2세의 보물선을 탈취하면서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것. 설상가상으로 교황 피우스5세가 1570년 엘리자베스를 파문하고 “엘리자베스를 제거하는 행동은 신의 은총을 받을 행동”이라고 선언하며 엘리자베스의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이런 와중에 메리는 1586년 반역음모에 연루된 게 발각되는데 18년간 유형생활동안 수차례 반역음모에 가담했다 용서받았지만 이번에는 엘리자베스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잉글랜드내 반정부세력과 카톨릭 세력이 소극적으로는 메리 스튜어트를 엘리자베스의 후계자로, 적극적으로는 엘리자베스를 폐위시키고 메리를 즉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함에 따라 ‘반란의 싹’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렇지만 엘리자베스와 두명의 메리간의 서로 죽고 죽이는 악연은 죽어서도 이어졌다. 엘리자베스1세가 죽은 뒤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1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그는 정치적 어머니인 엘리자베스를 위해 장대한 장례식을 치러주고 1606년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무덤도 마련했지만 동시에 생모인 메리 스튜어트를 위한 장엄한 무덤도 마련했다.

이어 제임스1세는 엘리자베스의 시신을 옮겨 이복 언니인 ‘블러디 메리’와 같은 방에 안치한다. 두 여왕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문에는 “두자매가 생전에 비록 종교적 불화로 갈라져 있었지만 이제 죽음 속에서 하나가 됐다”고 조롱조로 쓰여지게 되는데 세 여인간의 악연의 마지막 종지부로선 매우 씁쓸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참고한 책> Anne Somerset, ElisabethⅠ,Anchor Books 2003
박지향,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문화로 읽는 영국인의 자화상,기파랑 2006
박지향, 영국사-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까치 1997
케니스 O. 모건(Edited), 옥스퍼드 영국사, 영국사연구회 옮김, 한울아카데미 1994
E.L.우드와드, 영국사개론, 홍치모 외 옮김, 총신대학교출판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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