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범의 유럽문화기행] (9) 이탈리아 산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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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해안 풍경 인간 내면의 집시적 기질 자극
새벽 5시.기차는 덜컹덜컹 기지개 켜는 밤을 싣고 지중해변을 내달리고 있다. 내 앞에는 한 기분 나쁜 노인네가 아까부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아니 노려보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피사에서 차를 탄 팔십은 족히 돼 보이는 이 꾸부정한 노인네는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가 버릴 만큼 바싹 말랐고 그 몸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힘없이 바스러져 금방이라도 먼지로 화할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거의 수명을 다한 그의 육신은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 하나로 지탱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는 자그마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골 파인 뺨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몇 차례 실룩거리더니 잠잠해진다. 초콜릿 박힌 크라상이었다. 그의 메마른 목은 이제 부드러운 빵조차 넘기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는 다시 가방을 뒤졌다. 이번엔 자그마한 물병이 나왔다. 꼴깍.물 한 모금 넘어가는 소리가 팽팽하던 피아의 긴장을 깬다. 그러나 그의 눈초리는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경계의 눈빛이었다. 무수한 풍상과 육신의 퇴락이 차곡차곡 쌓아준 끝 모를 의심의 심연.그는 어떤 자와 대적해도 자기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아직도 눈싸움으로 상대를 제압하면 감히 자신을 해할 마음을 먹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한다. 기차는 막 제노바를 지났다. 그는 드디어 그 살벌한 눈초리를 거두어 들였다. 그는 노란 얼굴에 다소 왜소한 몸집을 한 안경 낀 젊은이가 더 이상 자신의 적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결국 지리한 전투의 승자는 피사 출신의 노 전사임이 일방적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승리를 챙긴 것일까? 노인네는 이내 가방에서 얇은 책 한 권과 약간은 통통한 붉은 색 볼펜을 꺼냈다. 그러더니 열심히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그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그 결연한 전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아마도 시인인가?
잠시 졸다가 눈을 떠보니 날이 밝았다. 창밖으로 지중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중해의 물빛은 검은 색에서 코발트빛으로 변해있었다. 아니 코발트빛에서 막 사파이어빛으로 변신하는 중이었다. 그 물빛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바다는 인간을 격정으로 몰고 가는 유혹의 마술사다. 그는 인간을 치명적 비극에 빠뜨리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불쌍한 인간들은 불장난을 부추기는 그의 덫 앞에 속수무책일 뿐이다. 그래서 많은 소설과 영화는 비극적 사랑의 출발점을 바닷가로 설정한다. 왜냐하면 바다는 인간 내면의 짚시적 기질을 일깨워 격렬한 운명의 파도 속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잠시 후 기차는 끼이익 하는 굉음을 쏟아내며 서서히 멈춰섰다.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산레모라는 푯말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곳이 바로 산레모란 말인가? 바다에 면한 화려한 별장과 해안의 요트가 낭만적 정취를 자아내는 이 작은 도시는 이제 그 명성이 다소 퇴색했지만 60~70년대만 해도 산레모가요제라는 행사를 통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곳이다.
1971년 가보로 출신의 시골처녀 나다는 '마음은 짚시'(Il cuore e'uno zingaro)라는 노래로 이 대회의 그랑프리를 차지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사랑에 빠진 젊은 여인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그린 이 노래는 나다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전 세계인에게 잊을 수 없는 스탠더드 넘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곡이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남기는 보다 큰 이유는 인간의 짚시적 속성을 너무나도 진솔하게 표현한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이 노래는 유혹의 신이 주재하는 바다의 도시에서 불려지지 않았던가?
5분 후 관절염을 앓고 있는 노쇠한 기차는 다시 몸을 일으키느라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순간 노전사의 다리 밑으로 책이 툭 떨어졌다. 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책으로 시선을 향했다. 순간 나는 포복절도할 뻔했다. 그의 책은 시작노트가 아니라 크로스 워드 퍼즐(십자말풀이) 책이었다.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