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비움과 채움

오규식 LG패션 부사장 ksoha@lgfashion.co.kr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중견 샐러리맨들도 비슷한 상황일 거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빚으로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가족에 대한 시간적 배려일 것이다. 필자 또한 아내와 두 딸에게 시간을 많이 내주지 못한 빵점 남편,빵점 아빠다. 일을 우선으로 하는 버릇이 지금도 잘 고쳐지지 않지만,몇 년 전부터 여름이면 꼭 휴가를 내 그동안 까먹었던 점수를 회복 중이다.

'휴가'란 의미의 영어 단어 'vacation'을 들여다 보면 '비우다'란 'vacate'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싶다. 아마도 일정을 '비우다'란 의미에서 변형됐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쌓였던 스트레스나 남을 미워했던 마음,고민,아쉬움 등 어둡고 안 좋은 앙금들을 모두 비우고 새롭고 좋은 것들로 채우자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직은 '비우자'는 마음으로 떠나는 휴가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가끔은 휴가를 가서 무언가를 잘못 '채우고'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특히 세계 정상급 '8282 근성'을 가진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외국에 나가 보면 복장 터지게 느긋한 외국인들의 일처리나 삶의 방식에서 참을성을 시험당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공항에서의 느긋한 입국절차라든가 호텔의 느린 인터넷 속도 등은 성격 급한 한국사람에게 고문이나 다름없다.

바쁘기로 치면 남부럽지 않은 필자를 포함,부지런히 사는 한국인들은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수고를 비우러 가는 휴가지에서조차 뭔가에 쫓기는 듯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래서인지 귀국길 외국 공항에서 마주치는 한국 사람들의 표정은 왠지 새롭고 좋은 것들로 채운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자신의 미래와 비전에 대해 걱정하는 한 직원의 얘기를 듣고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됐다. 개발시대의 선배들을 포함,우리 세대는 충전할 시간이 없이 달려왔다. 그런 노력과 희생이 오늘의 우리 경제를 일궜지만,지금 우리 사회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여유가 아닐까. 여유는 창조적인 사고를 가능케 한다. 글로벌 환경에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하게 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실제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있는 현대사회는 기성세대처럼 앞으로만 달려나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LG패션은 최근 용인에 '이룸'이란 연수원을 마련했다. '비움'이란 이름의 휴양관과 '채움'이란 이름의 교육관으로 구성돼 있다. 이름 그대로 필요없는 것은 비우고 새로운 것을 채움으로써 회사의 비전을 이뤄낸다는 뜻이다. 많은 후배들이 이 공간을 통해 비울 건 비우고 채울 건 채워서 지금보다 더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해 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외국 공항에서는 여유로운 한국인의 표정을 보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