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노장 배우

젊었을 땐 모른다. 나이의 굴레가 얼마나 무서운지.능력 여부에 상관없이 나이 때문에 포기해야 하거나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 늘어날 때의 쓸쓸함과 자괴감이 어떤 건지.어딜 가든 연장자 축에 들 때 느껴지는 나이의 무게가 사람의 가슴을 얼마나 세게 짓누르는지.

나이는 또 사람을 유치하고 치사해지게 만든다. 살면서 얻는 경력과 지혜에도 불구,나이 들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탓이다. 뭐든 가능할 것 같던 젊은 시절과 달리 자신의 한계가 절감되면 여유와 자신감 대신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괜히 속 좁게 구는 일도 다반사다. 노장 배우들의 맹활약에 주목하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순재(75) 신구(73) 박근형(69) 장용(64) 한진희(60) 강부자(68) 반효정(67) 선우용녀(64) 윤여정(62) 김해숙(54)씨 등 중진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는 나이듦이 족쇄 아닌 내공의 바탕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들의 활약은 놀랍다. 김해숙씨 외엔 모두 60~70대임에도 불구,시대극과 사극 시트콤,심지어 예능프로그램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데다 이쪽 저쪽 방송을 오가며 거의 매일 등장한다. 게다가 한 작품이 끝나기 무섭게 새 작품에 출연하니 1년 365일 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연이지만 비중이 큰 만큼 외워야 할 대사가 적지 않은데다 드라마 촬영이 주로 밤에 이뤄지는 걸 감안하면 체력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대부분 물러났을 나이에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얼굴 아닌 연기력으로 승부하고 성실함과 치열함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순재씨는 지금도 촬영 전 미리 상대방과 대사를 맞춰본다고 하고,선우용녀씨 또한 장수 비결로 남의 밥그릇 탐내지 않고 제 역할에 충실해온 것을 들었다. 좋은 드라마는 출연자 모두의 앙상블로 이뤄지는 만큼 어떤 역할인지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네티즌이 뽑은 최고의 중견배우로 꼽힌 김해숙씨의 경우 이름이 알려진 건 데뷔 26년차 때 찍은'가을동화'이후. 50대 중반에 주연같은 조연으로 각광받는 그는 긴 세월 동안 크든 작든 맡은 역할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말한다. 사람을 주저앉히는 건 나이나 조건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과 끈기 부족이라는 얘기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