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개미 열전]⑪무극선생 이승조…대박과 쪽박 넘나든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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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선생님, 주식투자란 무엇입니까?"
"주식투자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글 같은 주식시장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우직함과 단순함이 그 해답입니다"1984년 주식에 입문한 뒤 25년이란 세월동안 온갖 풍파를 다 겪어온 '무극선생' 이승조(50·사진)씨. 재야고수 36명과 함께 세운 새빛인베스트먼트 리서치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승조씨는 일반투자자들과 이런 선문답을 주고받곤 한다.
무극(無極). 혹자는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상상을 하며 천장이 뚫린 '무극'을 떠올리지만 이씨는 "'무극'이란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을 뜻한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 절정에 달했던 '무극선생' 이승조씨의 인기는 지금도 식지 않았다. 두 번의 치명적인 실패와 성공투자를 통해 현재의 안정적인 삶을 찾기까지 체험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주식에 갓 입문한 가정주부부터 증권업계에 진출하려는 햇병아리 경제학도에 이르기까지 무극선생으로부터 답을 얻으려는 노력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둥지를 튼 새빛인베스트먼트 빌딩 5층 리서치센터에서 만난 이승조씨는 '정말 주식투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시장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을 벌이는 지난한 투쟁"이라고 잘라 말했다. 몸의 힘을 빼고 미래의 경제흐름을 읽어내는 힘을 길렀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는 험난한 길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승조씨는 단 한 번의 주식투자로 500%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50억원을 쓸어 담은 원조 '슈퍼개미'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50억원을 손에 쥔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정은 파탄났고 형제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같은 길을 걸었던 친구 두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채업자들의 괴롭힘을 피해 떠돌이 신세를 전전해야 했다.주식투자로 인해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삶 자체였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방법을 배웠고 결국 기사회생했다. 그것이 무극선생이 가진 힘이자 가치다.
무극선생은 현재 직접투자는 하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 주식은 시간여행…"몸의 힘을 빼고 긴 호흡을 가져라""단언컨대 테마주는 속성 상 생명력이 6개월 안팎에 불과합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승조씨는 정책주로 포장된 테마주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테마주가 활개를 치고 있지만 그 생명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1992년 최악의 실패를 경험할 당시에도 테마주는 있었습니다. 당시는 정력과 미백 관련 바이오주와 유가 폭등에 따른 에너지절감 관련 종목들이 테마를 형성했고 부광약품이나 선도전기가 대장주였습니다. 하지만 테마주 생명은 6개월을 가지 않았고 결국 개인투자자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규모 투자자금과 정보력을 가진 기관투자자들이 미리 선점한 테마주 광풍에 휩싸일 경우 개인투자자들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최근 개인투자자들이 15% 이상의 변동성을 보이는 테마주에 맛을 들여 1∼2%의 착실한 수익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겁니다. 카지노 각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수익률이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오른만큼 내려오는 이론입니다. 테마주는 결국 이런 양상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는 앞으로의 경제 트렌드가 뭐가 될 것인가를 연구해 보고, 관련종목을 샀으면 당분간 주식시장을 떠나 있을 것을 권고했다. 심지어 증권사 객장 전광판은 3개월에 한번씩만 쳐다보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2008년 10월 주가 폭락기 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손절매해야 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정확히 연구하고 매수했으면 연말까지만 지켜보자고 했어요. 10명 중 8명은 이를 참지못하고 가지고 있던 주식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포를 샀던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이 급격히 회복되면서 엄청난 수익을 챙길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몸의 힘을 빼고 '시간여행'을 즐길 것을 거듭 강조했다.
"주식 전문가라는 저도 적중확률은 50%밖에 안됩니다. 지수를 맞추려고 노력도 해봤고 절대적인 투자기법을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해답은 그 어느곳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식은 '시간여행'입니다. 단기매매 보다는 파산하지 않을 알짜 우량주에 투자해 최소 3년은 기다리는 전략이 성패를 좌우합니다"
주식투자는 또 '생각의 훈련'이라고 말하는 이승조씨는 주먹구구식 투자가 아닌 자기만의 철저한 시나리오 투자법을 찾을 것을 권했다. 자금의 배분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미리 예상하고 시장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방향을 간파해 몸을 실어야 된다는 얘기다.
초심자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식에 대한 공부를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정도는 하고 시장에 참여해야 실패 확률이 적어집니다. 분석도 하지않고 논리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투자를 하면 변동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돼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주식시장의 법칙을 알고 자신만의 매매 시나리오를 짤 수 있는 수준이 됐을 때 투자에 돌입해도 늦지 않다는 것. 특히 초심자는 전체 자산의 30% 정도만 주식에 직접 투자해 이해력을 키우고 나머지는 적립식펀드 등을 통해 긴 호흡을 배워나갈 것을 주문했다.
◆ 50억 대박에서 17억 빚쟁이로 전락
학사장교 출신인 이씨는 주식시장에 발을 디딘 것은 1984년이다. 대우증권 조사부(현 리서치센터)에 입사해 '증권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같은 애널리스트 고참들이 기업탐방을 하면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주요 경제소식을 스크랩하는 시절을 보냈다. 조사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귀를 활짝 열어 놓았던 이씨는 정부의 한 경제정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자본자유화 5개년계획을 입안하고 증권사들의 대형화를 통해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놓았다. 대우증권의 경우 자본금 500억원 규모를 최대 3000억원까지 키우겠다는 복안도 포함돼 있었다.
이씨는 '이 바닥에서 정부 정책을 믿는 사람도 있느냐'는 부정적 반응이 대세일 때 남몰래 대우증권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투자기법이었다. 배정받은 자사주를 비롯해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통해 각각 5000만원씩을 변통, 1억원의 종자돈을 만들어 전액 대우증권 주식을 매수했다. 액면가 1000원짜리 주식이 800원~900원에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장기투자를 작심했던 이승조씨는 아예 대우증권 주식을 증권증서로 발행받아 장롱 속에 고이 모셔뒀다. 당시는 관련 법규가 느슨해 증권사 직원들도 자기 회사 계좌가 아니면 주식투자가 가능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1985년까지 무덤덤하던 대우증권 주가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으로 경제 활성화 붐을 타면서 1989년에는 5만4000원까지 치솟았다. 투자금 1억원이 50억원에 가까운 거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지금도 1988년 올림픽을 전후로 수직상승했던 경기를 경험했던 세대들은 아무리 경제가 좋아져도 불만을 토로합니다. 당시 짜릿한 경기활성화를 경험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벌수 있는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주식투자의 '귀재'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투자자들의 문의와 돈을 좀 굴려달라는 청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20대 초반에 꿈도 꾸지 못했던 거액을 만질 수 있게된 이씨는 자만에 빠지게 됐고 대리급 증권사 직원이라는 점도 싫증나기 시작했다. 망설임없이 사표를 던진 이씨는 대우증권 입사동기와 각각의 성(姓)씨 이니셜은 딴 'L&K투자정보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종자돈을 대준 양가 부모님께 10억원씩 나눠 드리고 나머지 자금과 투자자들의 자금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했고 이제는 100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도 생겨났습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고위 퇴역장교들 모임에서도 투자금을 선뜻 내놓았고 지인들도 돈을 좀 불려달라며 조건 없이 맡기기도 했다. 이렇게 수중에 들어온 자금이 자그마치 500억원.
하지만 비극적 종말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당시가 주식시장 장세로 보면 꼭지를 찍고 대세하락기로 돌아서는 이른바 '상투'였기 때문이다.
"탐욕이죠. 50억원 가까이 현금이 손에 들어오니까 100억원이 보이고 200억원도 보였습니다. 실력으로 번 것도 아니고 그냥 묻어뒀던 주식이 급등하며 얻은 망외소득이었던 탓에 정통한 매매기술도 없었을 때입니다. 내 돈 그릇은 조그마한데 탐욕의 한도는 그 이상었던 겁니다"
1000선을 육박하던 코스피 지수가 1992년에 400선으로 곤두박질 쳤다. 수익을 내기는커녕 매번 꼬이기만 했다.
"1992년은 제 인생에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순간이었습니다. 분산투자, 소수종목 집중투자, 심지어 시세조종(작전)의 유혹에 이르기까지 안 써본 투자방법이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깡통계좌가 속출했고 투자금은 거덜 나고 말았습니다"
손실금을 회복하기 위해 일가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명동 사채시장까지 찾았던 이씨는 결국 50억원의 대박에서 17억원의 빚쟁이로 전락했다.
◆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빚쟁이로 쫓기는 몸이 되자 아내는 더이상 참아주지 않고 이혼을 요구했고 끝내 남남이 됐다. 군인 출신으로 완고한 성격이던 아버지한테도 쫓겨났고 당시 다섯 살인 딸, 세살 배기 아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앉게 되고 말았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앞길이 창창했던 당시 현역 대위 남동생은 월급을 차압당해 소령 진급은 커녕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공무원이던 매제는 공직을 떠나야 했다.
"죽고 싶었습니다. 투자로 돈을 모조리 날렸다는 소문이 돌자 증권사 재취직은 물론 친구들에게까지 기피인물 1호로 찍혔지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습니다. 친하게 알고 지냈던 선배가 유학을 가며 13평짜리 오피스텔을 무료로 사용하게 해줘 간신이 아이들과 함께 차가운 이슬을 피할 공간을 마련했죠"
이 때부터 이씨는 작심했다.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해 투자의 역사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공황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주식매매를 했을까'가 화두였다. 1930년대 공매도로 희대의 자산가 반열에 올랐던 레시 리버모아가 왜 투자의 귀재에서 투기꾼으로 전략했나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10년간 투자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미래의 직관을 키우면서 현재는 나쁘지만 미래에 과실을 얻을 수있는 종목을 연구해 나갔다. 공부를 계속하며 호구지책으로 잡다한 일을 다 해봤지만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1995년에 실패에 관대한 외국계증권사 동방페레그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법인영업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외국계 증권사라 성과급제도가 활성화돼 있어 펀드매니저들의 구두까지 닦아주며 실적을 높였습니다. 성과급으로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 일부는 종자돈으로 챙겼지요"
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직격탄과 함께 파생상품으로 큰 손실을 입은 동방페레그린이 도산하면서 또 한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대우증권에 남아 있던 직원들의 도움으로 영업을 뛰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죠"
그러던 이씨는 어려운 시절 밤잠을 설치며 공부를 통해 쌓은 노하우를 풀어낼 기회를 잡고 기사회생하게 된다.
"2000년까지 증시가 큰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상승세를 탔습니다. 당시 주식투자자들에게 종목정보 등을 전화를 통해 제공하는 자동응답시스템(ARS)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기에 뛰어들어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ARS를 통해 한 달에 최대 5억원까지도 벌었다는 이씨는 이를 기반으로 일어설 수 있었고 현재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무극선생'이라는 필명도 그때부터 사용한 것이다.
빚을 갚고 김대중 정부 초기 IT(정보기술)업종이 한창 잘 나갈때 최대의 수익을 올린 이승조씨는 그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온갖 풍파를 겪으며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릎에서 사서 꼭지에서는 파는 전략을 고수해 현재는 수십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실패 뒤 체득하게 된 우직함과 단순함이라는 철학 때문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 "1인 지식기업 100개 만드는 게 목표"
이승조씨는 최근 연예인 매니지먼트와 비슷한 주식시장을 주름잡을 능력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도 열중하고 있다. 똑똑한 제자를 키워 제도권 증권사에 투입하는 일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진정한 금융 싸움꾼을 키우려고 합니다. 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경험한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해 줘서 국내외 금융업계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질을 갖춘 '지적 금융전사' 100명을 키울 생각입니다. '1인 지식기업'을 만드는 셈이지요."
인천국제공항 인근에 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도 서 있다. 정글같은 주식시장에서 지친 금융전사들의 쉼터이자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초기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현재도 독신인 이씨는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루 15시간을 일하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한 달에 50권의 양서들을 독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각종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TV의 출연 요청에 쉴 틈이 없다."주식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단순함과 우직함, 이 철학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으로 보답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무극선생은 모두에 꺼낸 말을 다시 되뇌였다.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었던 그의 말은 진정한 고수가 투자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글=한경닷컴 변관열·오정민 기자 / 사진=김기현 기자
"주식투자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글 같은 주식시장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우직함과 단순함이 그 해답입니다"1984년 주식에 입문한 뒤 25년이란 세월동안 온갖 풍파를 다 겪어온 '무극선생' 이승조(50·사진)씨. 재야고수 36명과 함께 세운 새빛인베스트먼트 리서치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승조씨는 일반투자자들과 이런 선문답을 주고받곤 한다.
무극(無極). 혹자는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상상을 하며 천장이 뚫린 '무극'을 떠올리지만 이씨는 "'무극'이란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을 뜻한다"고 말한다.
2000년대 초 절정에 달했던 '무극선생' 이승조씨의 인기는 지금도 식지 않았다. 두 번의 치명적인 실패와 성공투자를 통해 현재의 안정적인 삶을 찾기까지 체험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주식에 갓 입문한 가정주부부터 증권업계에 진출하려는 햇병아리 경제학도에 이르기까지 무극선생으로부터 답을 얻으려는 노력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둥지를 튼 새빛인베스트먼트 빌딩 5층 리서치센터에서 만난 이승조씨는 '정말 주식투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시장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을 벌이는 지난한 투쟁"이라고 잘라 말했다. 몸의 힘을 빼고 미래의 경제흐름을 읽어내는 힘을 길렀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는 험난한 길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승조씨는 단 한 번의 주식투자로 500%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50억원을 쓸어 담은 원조 '슈퍼개미'다.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50억원을 손에 쥔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가정은 파탄났고 형제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같은 길을 걸었던 친구 두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채업자들의 괴롭힘을 피해 떠돌이 신세를 전전해야 했다.주식투자로 인해 인생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삶 자체였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방법을 배웠고 결국 기사회생했다. 그것이 무극선생이 가진 힘이자 가치다.
무극선생은 현재 직접투자는 하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하며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 주식은 시간여행…"몸의 힘을 빼고 긴 호흡을 가져라""단언컨대 테마주는 속성 상 생명력이 6개월 안팎에 불과합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승조씨는 정책주로 포장된 테마주의 속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테마주가 활개를 치고 있지만 그 생명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1992년 최악의 실패를 경험할 당시에도 테마주는 있었습니다. 당시는 정력과 미백 관련 바이오주와 유가 폭등에 따른 에너지절감 관련 종목들이 테마를 형성했고 부광약품이나 선도전기가 대장주였습니다. 하지만 테마주 생명은 6개월을 가지 않았고 결국 개인투자자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규모 투자자금과 정보력을 가진 기관투자자들이 미리 선점한 테마주 광풍에 휩싸일 경우 개인투자자들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최근 개인투자자들이 15% 이상의 변동성을 보이는 테마주에 맛을 들여 1∼2%의 착실한 수익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겁니다. 카지노 각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수익률이 상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에는 오른만큼 내려오는 이론입니다. 테마주는 결국 이런 양상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는 앞으로의 경제 트렌드가 뭐가 될 것인가를 연구해 보고, 관련종목을 샀으면 당분간 주식시장을 떠나 있을 것을 권고했다. 심지어 증권사 객장 전광판은 3개월에 한번씩만 쳐다보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2008년 10월 주가 폭락기 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손절매해야 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정확히 연구하고 매수했으면 연말까지만 지켜보자고 했어요. 10명 중 8명은 이를 참지못하고 가지고 있던 주식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포를 샀던 투자자들은 주식시장이 급격히 회복되면서 엄청난 수익을 챙길수 있었습니다"
이씨는 몸의 힘을 빼고 '시간여행'을 즐길 것을 거듭 강조했다.
"주식 전문가라는 저도 적중확률은 50%밖에 안됩니다. 지수를 맞추려고 노력도 해봤고 절대적인 투자기법을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해답은 그 어느곳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식은 '시간여행'입니다. 단기매매 보다는 파산하지 않을 알짜 우량주에 투자해 최소 3년은 기다리는 전략이 성패를 좌우합니다"
주식투자는 또 '생각의 훈련'이라고 말하는 이승조씨는 주먹구구식 투자가 아닌 자기만의 철저한 시나리오 투자법을 찾을 것을 권했다. 자금의 배분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미리 예상하고 시장의 에너지가 움직이는 방향을 간파해 몸을 실어야 된다는 얘기다.
초심자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식에 대한 공부를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정도는 하고 시장에 참여해야 실패 확률이 적어집니다. 분석도 하지않고 논리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 투자를 하면 변동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게 돼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주식시장의 법칙을 알고 자신만의 매매 시나리오를 짤 수 있는 수준이 됐을 때 투자에 돌입해도 늦지 않다는 것. 특히 초심자는 전체 자산의 30% 정도만 주식에 직접 투자해 이해력을 키우고 나머지는 적립식펀드 등을 통해 긴 호흡을 배워나갈 것을 주문했다.
◆ 50억 대박에서 17억 빚쟁이로 전락
학사장교 출신인 이씨는 주식시장에 발을 디딘 것은 1984년이다. 대우증권 조사부(현 리서치센터)에 입사해 '증권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같은 애널리스트 고참들이 기업탐방을 하면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주요 경제소식을 스크랩하는 시절을 보냈다. 조사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귀를 활짝 열어 놓았던 이씨는 정부의 한 경제정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자본자유화 5개년계획을 입안하고 증권사들의 대형화를 통해 금융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내놓았다. 대우증권의 경우 자본금 500억원 규모를 최대 3000억원까지 키우겠다는 복안도 포함돼 있었다.
이씨는 '이 바닥에서 정부 정책을 믿는 사람도 있느냐'는 부정적 반응이 대세일 때 남몰래 대우증권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단순하면서도 우직한 투자기법이었다. 배정받은 자사주를 비롯해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통해 각각 5000만원씩을 변통, 1억원의 종자돈을 만들어 전액 대우증권 주식을 매수했다. 액면가 1000원짜리 주식이 800원~900원에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장기투자를 작심했던 이승조씨는 아예 대우증권 주식을 증권증서로 발행받아 장롱 속에 고이 모셔뒀다. 당시는 관련 법규가 느슨해 증권사 직원들도 자기 회사 계좌가 아니면 주식투자가 가능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1985년까지 무덤덤하던 대우증권 주가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으로 경제 활성화 붐을 타면서 1989년에는 5만4000원까지 치솟았다. 투자금 1억원이 50억원에 가까운 거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지금도 1988년 올림픽을 전후로 수직상승했던 경기를 경험했던 세대들은 아무리 경제가 좋아져도 불만을 토로합니다. 당시 짜릿한 경기활성화를 경험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벌수 있는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주식투자의 '귀재'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투자자들의 문의와 돈을 좀 굴려달라는 청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20대 초반에 꿈도 꾸지 못했던 거액을 만질 수 있게된 이씨는 자만에 빠지게 됐고 대리급 증권사 직원이라는 점도 싫증나기 시작했다. 망설임없이 사표를 던진 이씨는 대우증권 입사동기와 각각의 성(姓)씨 이니셜은 딴 'L&K투자정보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종자돈을 대준 양가 부모님께 10억원씩 나눠 드리고 나머지 자금과 투자자들의 자금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했고 이제는 100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도 생겨났습니다"
직업군인인 아버지와 안면이 있는 고위 퇴역장교들 모임에서도 투자금을 선뜻 내놓았고 지인들도 돈을 좀 불려달라며 조건 없이 맡기기도 했다. 이렇게 수중에 들어온 자금이 자그마치 500억원.
하지만 비극적 종말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당시가 주식시장 장세로 보면 꼭지를 찍고 대세하락기로 돌아서는 이른바 '상투'였기 때문이다.
"탐욕이죠. 50억원 가까이 현금이 손에 들어오니까 100억원이 보이고 200억원도 보였습니다. 실력으로 번 것도 아니고 그냥 묻어뒀던 주식이 급등하며 얻은 망외소득이었던 탓에 정통한 매매기술도 없었을 때입니다. 내 돈 그릇은 조그마한데 탐욕의 한도는 그 이상었던 겁니다"
1000선을 육박하던 코스피 지수가 1992년에 400선으로 곤두박질 쳤다. 수익을 내기는커녕 매번 꼬이기만 했다.
"1992년은 제 인생에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순간이었습니다. 분산투자, 소수종목 집중투자, 심지어 시세조종(작전)의 유혹에 이르기까지 안 써본 투자방법이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깡통계좌가 속출했고 투자금은 거덜 나고 말았습니다"
손실금을 회복하기 위해 일가친척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명동 사채시장까지 찾았던 이씨는 결국 50억원의 대박에서 17억원의 빚쟁이로 전락했다.
◆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빚쟁이로 쫓기는 몸이 되자 아내는 더이상 참아주지 않고 이혼을 요구했고 끝내 남남이 됐다. 군인 출신으로 완고한 성격이던 아버지한테도 쫓겨났고 당시 다섯 살인 딸, 세살 배기 아들과 함께 길거리로 나앉게 되고 말았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앞길이 창창했던 당시 현역 대위 남동생은 월급을 차압당해 소령 진급은 커녕 군복을 벗어야 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공무원이던 매제는 공직을 떠나야 했다.
"죽고 싶었습니다. 투자로 돈을 모조리 날렸다는 소문이 돌자 증권사 재취직은 물론 친구들에게까지 기피인물 1호로 찍혔지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습니다. 친하게 알고 지냈던 선배가 유학을 가며 13평짜리 오피스텔을 무료로 사용하게 해줘 간신이 아이들과 함께 차가운 이슬을 피할 공간을 마련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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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0년간 투자 트렌드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미래의 직관을 키우면서 현재는 나쁘지만 미래에 과실을 얻을 수있는 종목을 연구해 나갔다. 공부를 계속하며 호구지책으로 잡다한 일을 다 해봤지만 살림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1995년에 실패에 관대한 외국계증권사 동방페레그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법인영업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외국계 증권사라 성과급제도가 활성화돼 있어 펀드매니저들의 구두까지 닦아주며 실적을 높였습니다. 성과급으로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 일부는 종자돈으로 챙겼지요"
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직격탄과 함께 파생상품으로 큰 손실을 입은 동방페레그린이 도산하면서 또 한번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그래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습니다. 대우증권에 남아 있던 직원들의 도움으로 영업을 뛰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죠"
그러던 이씨는 어려운 시절 밤잠을 설치며 공부를 통해 쌓은 노하우를 풀어낼 기회를 잡고 기사회생하게 된다.
"2000년까지 증시가 큰 변동성을 보이면서도 상승세를 탔습니다. 당시 주식투자자들에게 종목정보 등을 전화를 통해 제공하는 자동응답시스템(ARS)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기에 뛰어들어 빚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ARS를 통해 한 달에 최대 5억원까지도 벌었다는 이씨는 이를 기반으로 일어설 수 있었고 현재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무극선생'이라는 필명도 그때부터 사용한 것이다.
빚을 갚고 김대중 정부 초기 IT(정보기술)업종이 한창 잘 나갈때 최대의 수익을 올린 이승조씨는 그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온갖 풍파를 겪으며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릎에서 사서 꼭지에서는 파는 전략을 고수해 현재는 수십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실패 뒤 체득하게 된 우직함과 단순함이라는 철학 때문이라고 이씨는 말했다.
◆ "1인 지식기업 100개 만드는 게 목표"
이승조씨는 최근 연예인 매니지먼트와 비슷한 주식시장을 주름잡을 능력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일에도 열중하고 있다. 똑똑한 제자를 키워 제도권 증권사에 투입하는 일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진정한 금융 싸움꾼을 키우려고 합니다. 제가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경험한 노하우를 그대로 전수해 줘서 국내외 금융업계 어디서든 살아남을 자질을 갖춘 '지적 금융전사' 100명을 키울 생각입니다. '1인 지식기업'을 만드는 셈이지요."
인천국제공항 인근에 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도 서 있다. 정글같은 주식시장에서 지친 금융전사들의 쉼터이자 세계로 뻗어나가는 전초기지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현재도 독신인 이씨는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루 15시간을 일하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한 달에 50권의 양서들을 독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각종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TV의 출연 요청에 쉴 틈이 없다."주식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단순함과 우직함, 이 철학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성공으로 보답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무극선생은 모두에 꺼낸 말을 다시 되뇌였다.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었던 그의 말은 진정한 고수가 투자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글=한경닷컴 변관열·오정민 기자 / 사진=김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