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외국인 상사 vs 한국인 부하

"情이라곤 찾아볼래야…" vs "일은 않고 친해지려고만 하니…"
화성에서 온 외국인 상사
오랜 관행인 접대비 문제 삼고, 휴일에 나와 밀린 일 했더니 비효율적인 무능력자 취급

금성에서 온 한국인 부하
영어 못 알아듣고도 무조건 "YES" 엉뚱한 내용의 보고서도 많아, 한국식 상명하복 문화 답답해#1.'성질 같아선 그냥 확!' 김 과장은 오늘도 끓어오른다. 얼마 전 새로 부임한 피터 팀장 때문이다. 일단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다. 일 외에 다른 건 신경쓰지 않아서 좋다. 그렇지만 답답하다. 쿨(cool)한 것 같은데 겪어보면 딴판이다. 접대비 내역을 들먹이며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하는데 할 말이 없다. 서류철을 집어던지며 구둣발로 걷어차긴 했어도 술 한잔으로 기분을 풀어주던 전임 김 이사가 슬슬 그리워진다.

#2.미국 굴지의 다국적 기업에서 국내 대기업으로 스카우트된 피터.그는 한국 직장인들을 보고 놀랐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정열적으로 일하는 그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눈치영어'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못 알아들었으면 물어보기라도 해야지,제멋대로 해석한 뒤 엉뚱한 일을 만들어 온다. 일은 열심히 하는데 효율성은 떨어진다. 은근히 폐쇄적이기도 한 그들과 어울리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 비단 외국계 회사만이 아니다. 국내 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외국인 상사와 일하는 건 장점도 많다. 그렇지만 '문화적 충돌'도 상당하다. 외국인을 상사로 맞은 김 과장과 이 대리들,이들을 부하로 맞은 외국인 상사의 속내를 들여다 봤다. ◆'한국식 문화' 이해 못하는 외국인 상사

외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박모씨(33).그는 최근 부임한 영국인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박씨는 업무 성격상 클라이언트들을 종종 비싼 술집에서 접대하곤 한다. 영국인 상사는 이런 관행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밥과 술로 고객을 유치하려 하지 말고 실력으로 승부하라"는 투다. 가끔은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쓰는 것은 당신의 능력과 관계있는 일"이라고 염장을 지르기도 한다.

제약회사의 민 과장(35)은 일이 밀려 얼마 전 금요일 밤 11시까지 일했다. 다음날인 토요일에도 잠깐 회사에 나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미국인 임원이 불렀다. "혹 회사가 도와줄 일이 있거나 일거리가 너무 많느냐"는 거였다. 김 과장은 즉시 모범답안을 내밀었다. "그렇지 않다. 괜찮다"고.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칭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돌아온 답은 이랬다. "민 과장은 앞으로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할 필요가 있어요. 일을 제시간에 끝냈으면 더 높은 수준의 일을 맡기려 했는데,안 되겠네요. " 한마디로 능력이 없다는 말이었다. 외국계 엔지니어링 회사에 다니는 신 차장(37)은 미국인 사장 때문에 '뚜껑'이 열린 적이 있다. 그는 작년 아내 건강이 좋지 않아 몇 차례 결근을 했다. 당시 사장은 "아내가 아픈데…"라며 결근을 인정했다. 그 뒤 신 차장은 인사고과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기대 이하의 고과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私)는 사,공(公)은 공'이라는 외국인의 냉정함에 신 차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국인을 상사로 모시고 있는 김 과장과 이 대리들의 가장 큰 고민은 가치관 차이다. 우리에겐 '최선,성실'로 통하는 게 그들에겐 '비효율,불합리'로 비쳐지곤 한다. 비화하면 '화성에서 온 상사,금성에서 온 부하' 꼴이다. 이들은 외국인이 한국에 왔으면 '코리안 웨이(한국식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무조건 예스맨'인 한국인 부하외국인 상사들도 '복장이 터지는 건' 마찬가지다. 한국인 직원들이 한국식 문화에서 좀처럼 탈피하지 못하는 탓이다.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심각한 문제는 '예스 앤드 게스(yes & guess)'.상사의 지시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일단 '알았다(yes)'고 한 뒤 지시사항을 '추측(guess)'해 일을 처리해 상사를 난감하게 만들곤 한다는 것이다.

한 인도계 영국인 임원은 "처음 업무 지시를 했더니 담당 직원이 즉석에서 알았다고 해서 철석같이 믿었다"며 "막상 해온 일은 전혀 엉뚱한 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왜 그렇게 됐는지 알아봤더니 영어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며 "잘 알아듣지 못했으면 물어봐야 하는데 한국인 직원들은 상사에게 되묻는 걸 큰 죄악처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비단 영어만이 아니다. 영어로 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는 직원도 상사의 지시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수행한다. 미국계 회사의 지사장인 한 미국인은 "모호한 지시를 내리더라도 한국인 직원들은 정말 열심히 보고서를 만들어 온다"며 "그렇지만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의문이 나더라도 질문을 하지 않아 취지와 어긋나는 보고서를 만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한국식 상명하복 문화가 답답하다는 반응이다.

'관계 중독증'도 외국인 상사가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국내 대기업의 한 영국계 임원은 "한국인 직원들은 담당 임원이 바뀌면 일단 사적으로 친해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상황은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러다 보니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외국계 은행의 프랑스인 임원은 "개인적으로 술자리 밥자리 한번 안 하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며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습성도 문제"라고 주장했다.

◆서로에게 배운다

외국인 상사와 일하는 게 골칫거리인 것만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일하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 당장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 이들이 글로벌화된 시각을 갖고 있는데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해 업무와 관계없는 일에는 신경쓰지 않아서 좋다. 출퇴근시간도 비교적 정확하다. 술을 강요받는 회식자리에 억지로 가지 않아도 된다. 다국적 CEO(최고경영자) 헤드헌팅 전문업체인 콘페리의 채은주 부사장은 "외국인 상사는 연간 휴가를 확실하게 보장해주고 근무시간을 엄격히 지켜주기 때문에 일과 가정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점이 좋다"고 설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식 문화에 익숙해지는 외국인 상사도 많다. 한 대기업 과장은 "노조관계를 풀기 위해 저녁마다 폭탄주를 마다하지 않는 외국인 임원을 보면서 이들의 프로의식을 느끼곤 한다"고 전했다.

외국인 상사들도 갈수록 한국인 부하를 좋아한다. 세계 어느 나라 직장인보다 한국 직장인들은 충성도가 뛰어나다. 가정생활을 포기할만큼의 성실성도 높이 살만하다. 지시사항을 어떡하든 실행에 옮기려는 도전정신도 한국 직장인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덕목이다. 20년 이상을 한국에서 사업해 온 한 미국인은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지시사항을 수행하겠다는 자세는 한국인에게만 있는 것 같다"며 "일에 대한 집중력과 열정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한 전자회사 임원은 이를 '유비쿼터스 정신'으로 표현했다. 그는 "24시간 365일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애니타임 어베일러블(anytime available)'이 한국인 부하의 장점"이라며 "술 먹고 집에서 잠자다가 전산망이 다운됐다는 소리를 듣고 일요일 새벽 3시에 회사로 달려오는 건 한국인 부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상은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