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뷰] 한국 기업인들의 착각

국제 거래ㆍ계약서 '우리식' 안통해, 소송때도 조속한 해결만 고집 말아야
염정혜
며칠 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세미나에 참석,'아시아기업의 분쟁피해 사례'라는 주제로 초청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나빠지면 기업간 소송 및 중재사건이 늘어난다. 그 때문인지 중국,인도,일본 등지로부터 수백명의 기업 국제업무 및 법무 담당자들이 참석했다.

미국 로펌에서 오랫동안 기업분쟁을 다뤄온 필자는 국제거래를 하는 한국 등 아시아기업들이 소송에 휘말리는 가장 큰 이유는 계약 초기 단계에서 서로간의 관계를 서류상으로 명확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 기업은 자국내 상관례 및 법률체계가 상대방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믿는다. 또 상대방에게 자꾸 따지며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예의바르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행동이 자칫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해 협상이나 계약이 깨지지 않을까 우려한다. 따라서 웬만하면 상대방의 요구를 수용해주는 편이다. 우리가 신뢰하고 양보해주면 상대방도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로.하지만 큰 착각이다. 미국 기업문화는 계약 및 거래 초기단계에서는 상대방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워낙 이해관계를 정확히 따지는 게 일반적이라 기본적인 권리문제를 간과하는 상대방을 되레 무시한다.

사례를 들자면 무궁무진하다. 지난달 우리 고객사인 일본의 한 중견 기업이 뉴욕 연방법원에 제소를 당했다. 사정은 이렇다. 일본 회사는 17년간 아웃소싱을 담당해온 미국 컨설팅업체가 최근 수년간 실적이 나빠 지난해 수임계약을 해지했다. 계약서에 따르면 실적이 나쁘면 약정한 보수의 75%만 지불하면 된다. 하지만 일본회사는 오랜 기간의 '정' 때문에,그리고 빨리 관계를 마무리짓고 다른 업체를 찾기 위해 실적부진에도 미국회사에 100%를 지급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8개월 후 "일본 업체가 정당한 사유없이 계약을 파기했고 이 때문에 다른 업체와의 계약까지 파기됐다"며 2000만달러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실적부진은 일본회사 탓이었으며 실적이 나쁘면 약정보수의 75%만 지급하고 계약을 해지했어야 하는데 100%를 지급한 것은 일본회사도 책임이 있다는 걸 간접 시인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

당황해 뉴욕으로 날아온 일본 회사 대표에게 소송팀이 던진 첫 질문은 "Did your company obtain a release?(면책승인서에 서명 받으셨나요? · 면책승인서란 계약만료 때 향후 어떤 법적 소송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서구기업 사이 일반화돼 있다)"였다. 대답은 물론 'No'였다. 계약해지하는 것도 미안한데 면책승인서까지 받는 건 너무 야박하지 않느냐는 게 일본인 대표의 하소연이었다. 로펌비용(변호사비용)과 관련,엄격한 사내규정을 둔 미국기업과 달리 아시아기업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터무니없는 변호사 비용에 관해 잘 알려진 사례 하나. 뉴욕의 한 대형 로펌은 뉴욕법이 적용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된 국제중재사건과 관련,무려 4000만달러가 넘는 변호사 비용을 청구했다. 해당 고객이 아시아기업이었다는 게 우연은 아닌 듯 싶다.

소송 · 중재에 대한 한국 등 아시아 기업인들의 인식도 문제다. 아시아 기업인들은 소송을 하거나 또는 당하는 것을 큰 과실로 여긴다. 따라서 법으로 따지면 훨씬 유리한데도 특히 최고경영자(CEO)의 압박 때문인지 손해를 보더라도 빨리 끝내려 한다. 반대로 소송이 '비즈니스의 일부'인 미국 기업은 느긋해 법적 다툼에서 항상 유리한 고지에 선다.

경기불황 탓인지 기업분쟁이 늘고 있다. 미 연방법원의 소송기록을 보면 한국기업의 소송 및 분쟁 건수도 몇달 새 부쩍 늘었다. 모쪼록 국제 상거래나 국제소송 · 중재 등의 경우 본능적으로 한국 내 기업문화 및 법체계에 의존해 상황 및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