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존엄사

1975년 4월 카렌 퀸란(21세)은 약을 먹고 친구 생일 파티에서 술을 마시다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가 됐다. 6개월 뒤 부모는 딸이 품위있게 죽을 수 있도록 인공 호흡기 제거를 요청했으나 의사는 거절했다. 문제는 법정으로 옮겨졌고 지방 법원은 살인 행위라고 판결했다.

뉴저지주 대법원은 그러나 76년 3월 헌법에 보장된 사생활 보호권 관점에서 인공 호흡기를 떼도 좋다는 판결을 내렸다. 카렌은 인공호흡기 제거 후 10년을 더 살다 86년 사망했다. 존엄사 인정의 계기가 됐다는 '카렌 퀸란 사건'의 내용이다. 존엄사란 인간의 경우 생물학적 생존보다 정신적 · 인격적 생존이 중요하다는 데 바탕을 둔다. 안락사와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안락사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의 단계에 들어선 환자의 고통을 덜고자 죽게 하는 것'이고,존엄사는 '소생 가능성 없는 혼수상태나 뇌사상태 환자가 품위있게 죽을 수 있도록 생명유지 장치를 떼는 것'이 골자다.

대법원이 뇌출혈 환자의 퇴원을 허락한 서울 보라매 병원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인정한 뒤부터 국내 의료계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였던 존엄사에 대해 서울대 병원이 사실상 인정하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말기암 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원할 경우 사전 의료지시서 확인 등을 통해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사망시기 연장에 불과한 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환자와 환자 가족 모두를 힘들게 할 뿐인 만큼 허용해야 한다는 쪽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지만,그럴 경우 가난한 환자들이 남은 가족을 생각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고,안락사가 긍정되거나 중환자가 방치될 수 있다는 반대론 또한 적지 않다. 70대 여성의 인공호흡기 제거 문제를 놓고 환자 가족과 병원 측의 공방이 거듭돼온 세브란스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는 만큼 서울대 병원의 이번 발표가 존엄사 인정에 관한 분수령이 될지는 단정짓기 어렵다.

중요한 건 무엇보다 그동안 의학 발전에 비해 소홀히 취급돼온 의료 윤리 부문을 대폭 강화하는 일이다. 세계의사회가 1981년 리스본 총회에서 채택한 '환자 권리 선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현실적,논리적,법적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의사들은 항상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환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