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청문회 스타에서 포괄적 뇌물 피의자로…정치인생 20년 영욕

23일 오전 8시50분쯤 사망이 확인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풍운아' 그 자체였다.

노 전 대통령은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재야인사 영입 사례로 발탁돼 지난 1988년 국회 입성했다.
같은해 '5공 청문회'에서 증인에게 날카로운 질문 세례로 국민적 '스타'로 발돋움했다.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삼수'의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도전 실패, 1996년 서울 종로 패배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당시 민주당 잔류파들과 함께 결성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가 '3김 청산과 세대교체'를 내건 이인제 후보 지지 등으로 의견이 갈릴 때 "시대의 과제는 정권교체"라고 주장했다.

이어 1998년 7월 종로 보선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를 마다하고 부산에 자원 등판했다가 쓴 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출마는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간판을 달며 '동서 분할 종식', '국민 통합'이라는 주제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국민적 지지의 출발점인 '노사모'도 이 무렵 탄생했다.

그는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발탁으로 정치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대권 도전의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다. "정치인 집단을 조직화하고 세력으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 번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했듯, 약점을 보완하는 기간이었다.

그는 2001년 3월 장관직을 떠난 뒤 본격적인 대선 후보경선 준비에 나섰다.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국민참여 경선'에 힘입어 '이인제 대세론' 맞받아치며 극복했다. 몇 차례 말 실수로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지지도 하락을 경험했지만 월드컵 축구 4강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 대권을 거머쥐었다. 제16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는 등 정치적 굴곡은 계속됐다.

그의 20년 정치 인생은 '충돌'과 '도전'의 역사였다. '도덕성'은 힘의 근원이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성장기와 자수성가형 인생 스토리는 '못가진 자'에 위로를 주며 정치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이 두가지는 노무현 정부를 떠받치는 기둥 노릇을 했다.

그러나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계 로비가 공개되면서 노전 대통령은 그가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웠던 도덕성에 크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특히 지난달 30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과 대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재계는 물론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영욕의 20년 정치인생을 살아왔던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국민들을 또다른 충격을 주고 있다.

한경닷컴 박세환 기자 gre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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