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서울광장

고대 그리스에는 '아고라(agora)'라고 불리는 광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 의미로 주로 도시 중심부나 항구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에 공공건물과 회의장 사원 등이 있었던 만큼 자연스럽게 정치 종교 상업 사교의 중심이 됐다. 로마에선 '포럼(forum)'이란 광장을 중심으로 생활이 이뤄졌다.

서구 민주주의가 광장에서 싹텄다는 주장이 있다. 사람들이 모이면 다양한 토론이 벌어지기 마련이어서 광장을 중심으로 민의(民意)가 수렴됐다는 것이다. 아고라가 그리스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고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런던의 트래펄가 광장도 근대 시민혁명의 산실 역할을 했다는 설명이다. 동양에 민주주의가 늦게 출현한 것을 변변한 광장이 없었던 것과 연결시키는 학자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광장 대신 사랑방 같은 작은 공간에서 의견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사랑방은 이해관계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던 만큼 민의를 수렴하는 장소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국회든 인터넷이든 우리가 토론을 통한 의견집약에 익숙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

서울시청 앞이 광장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은 1987년 민주화 투쟁 때다. 그 해 7월9일 이곳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노제(路祭)에 수십만명의 추모 인파가 몰려들면서 민주화의 기폭제가 됐다. 2002년 한 · 일월드컵 때는 축제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거리응원이 펼쳐지면서 한국 대 미국전 15만명,포르투갈전 47만명,이탈리아전 55만명,독일전 80만명의 인파가 이곳을 메웠다.

2004년 5월1일에는 4000여평의 잔디광장이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름도 서울광장으로 바뀌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일이다.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나 지난해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장소가 서울광장으로 확정됨에 따라 시민들은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게 됐다. 살아서 지고왔던 짐이 아무리 무거웠어도 '서민 대통령'으로서의 그는 갈등보다는 화해를,분열보다는 통합을 원할 게다. 서울광장이 상실의 아픔을 함께하고 화해의 손길을 나누는 통합의 광장으로 거듭나길바랄 뿐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