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를 잇는 家嶪] (60) 이구산업 ‥탄피 모아 구리 만들던 회사, 비철금속업계 '리틀 포스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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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銅)와 구리합금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대다수 제품의 원료로 사용된다. 전선이나 배선기구,반도체 리드프레임을 비롯해 가전,통신기기,자동차,선박,항공기 등을 만들려면 사용량의 차이는 있지만 제조공정에서 구리가 빠질 수는 없다. 예컨대 승용차 한 대에는 대략 20㎏ 정도의 동 및 동합금 부품이 들어간다. 가공이 쉬운 데다 열과 전기 전도성도 뛰어난 물성(物性)을 갖고 있어서다.
구리 관련 원자재를 생산하는 이구산업은 비철금속 분야의 '리틀 포스코'로 통한다. 용광로에서 구리를 녹여내는 제조 공정이 유사한데다,국내외 기업들에 구리 및 구리합금 소재를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산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 기업이기도 하다. 이구산업의 창업자는 손정환 회장(87). 1968년 창업 후 40여년간 구리 제조란 한 우물을 파온 업계의 산증인인 손 회장은 기자와 만나 "예전엔 구리가 정말 귀했어.달러가 없어 원료 수입은 엄두도 내지 못해 월남파병군이 가져온 탄피를 수거해 제품을 만들곤 했지…"라며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경기도 고양군 성북리(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태어난 손 회장은 보통학교를 졸업한뒤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친척집을 전전하며 약국과 주물대리점 점원 등으로 사회경험을 쌓아왔던 그는 1946년 종로구 혜화동에 '정강공작소'란 철공소를 차리고 함석을 가공해 주택용 지붕이나 건축용 빗물통을 만들었다. 철공소는 손 회장 특유의 근면성과 오랜 점원생활로 익힌 사업수완 덕분에 돈벌이가 쏠쏠했다. 결혼으로 생활이 안정되고 돈 버는 재미에 빠져들 만할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보니 사업터전은 이미 폐허로 변한 상태여서 1년6개월을 실업자 신세로 지내야 했다.
절치부심하던 손 회장은 1955년 서울 을지로 3가에 함석도매업을 하는 '덕흥철강'을 설립,두 번째 사업에 도전했다. 원점에서 출발했지만,기존의 사업 경험에다 피난시절 겪었던 고생으로 '내공'까지 갖추게 돼 기반을 잡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휴전 이후 주택건설붐이 불면서 일거리가 넘쳐난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적잖은 목돈을 마련한 손 회장은 남을 도와주는 사업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제조업 분야로 눈을 돌렸다. 업종을 함석에서 구리로 바꾼 것에 대해 그는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지만,구리의 쓰임새와 효용성을 간파한 후 향후 산업근대화과정에서 수요가 늘 것으로 판단한 데 따른 결단이었다.
손 회장은 1968년 서울 변두리 지역이었던 성동구 화양동의 3966㎡(약 1200여평)부지를 매입,개인회사인 이구산업사를 차렸다. 벙커C유를 원료로 하는 용해로와 압연기 1대가 자산의 전부였다. 정부 주도로 산업근대화가 추진되면서 손회장의 예측대로 구리 수요가 늘면서 회사도 꾸준히 커졌다. 원료가 귀한 시절이라 고철(스크랩)이나 월남전 참전 군인이 가져온 탄피,미군부대 등에서 나온 폐가전제품 등에서 구리를 추출해 황동판을 찍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동판은 재가공을 거쳐 시계태엽과 전기소켓 등 재료로 쓰였다.
혹독한 성장통도 치러야 했다. 주요 거래처의 부도로 어음을 회수하지 못해 수차례 휘청거렸고,1970년대 초에는 1차 오일쇼크와 경쟁업체와의 과당경쟁으로 몸살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80년 초 정부의 방화관제훈련에 따른 잦은 소등을 피하고,규모 확장을 꾀하기 위해 반월공단으로 옮겨간 게 화근이 됐다. 1만6529㎡(5000여평)의 반월공단 부지에 생산설비를 갖추느라 돈을 빌렸는데,제2차석유파동과 10 · 26사태 후 경제혼란을 틈타 회사채 금리가 10% 남짓에서 25% 수준으로 급등한 것.영업이익은 냈지만 은행이자를 부담하느라 월 적자가 1억원씩 발생, 살던 집을 비롯해 보유자산을 전부 처분하고서야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구산업은 1983년 손 회장의 장남인 손인국 대표(60)가 취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회사의 성장속도가 '거북이 걸음'에서 '토끼 걸음'으로 바뀐 게 이때부터다. 1974년 이구산업에 입사해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은 손 대표는 자동화시스템 도입 등으로 공장현대화 작업을 밀어붙였다. 규모의 경제효과를 실현하기 위해 반월에 이어 안산 시화공단(1994년)과 평택 포승공단(2004년)에 잇따라 생산공장을 준공,화양리 시절 월 3000t이던 생산규모를 3만t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특히 2002년 연매출 400억원 규모의 이구산업이 1000억원을 투입,3만평 규모의 포승공장을 짓기로 결정할 당시만 해도 업계에선 '무모한 시도'라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그렇지만 포승 제3공장을 준공한 뒤 지난해 1831억원의 매출을 달성,3년 새 외형을 4배 이상 키우며 주위의 우려를 간단히 잠재웠다. 손 대표는 국내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최근 기업인이 받는 상의 최고봉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손대표는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기술 축적에 매달리며 회사 체질도 바꿔나갔다. 고철(스크랩)을 원료로 시계태엽이나 동식기 재료 등을 만들던 이구산업의 주력제품은 손 대표 취임 후 점차 자동차,전자부품 등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옮겨가고 있다. 내수 기업인 이구산업을 수출기업으로 변신시킨 것도 손 대표의 주도로 이뤄졌다.
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