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기초야 미안해!

어느날 문득 요리를 배워야겠다는 절실함이 솟구쳐 친한 언니가 다니는 유명 요리학원에 따라갔다.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약간의 두려움과 너무 몰라 창피당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떨렸다. 평소 소소한 요리는 화학 조미료를 쓰지 않고 곧잘 만들었지만,괜찮은 식당에서나 맛보던 음식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이런…,이게 뭔가. 한 수업에서 한 가지 요리가 아니라 많게는 서너 가지를 만들지 않는가. 거기다 선생님 스케줄 때문에 다음 시간 요리까지 한번에 만드는 날이면 메모만 하다 시간이 다 가 버리기 일쑤다. 메모하느라 허둥지둥하다 선생님 말씀 놓치면 옆 사람 메모 커닝하기도 바쁠 때가 많았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6개월 과정을 끊었으니 일단 열심히 다닌 후 다른 대책을 세우자.분명 더 나은 방법이 있겠지.시작하지도 않고 주저앉는 것보다는 정면으로 부딪쳐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만해 보이거나 흥미 있는 요리들은 집에 와서 애써 실습을 했고,그렇게 배운 몇 가지 요리는 친한 친구나 지인들에게 만들어 줬다. 그리고 좋아하는 표정을 보며 성급하게 높은 점수를 기대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점수가 아니라 요리를 마친 후의 부엌이었다. 깔끔한 음식을 만든 뒤 남는 건 산더미 같은 치울 거리들이었다. 게다가 일상 생활 속에서 매일 해 먹는 재료가 아니다 보니 살 때도 낭비,두어도 낭비였다. 쯧쯧쯧.그래서 다시 생각해 봤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렇게 하나? 아닐 거야.난 화려한 싱글(그렇게 보인답니다) 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찬 더블이나 트리플로,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며 행복을 맛보는 베테랑 주부들이다. 그때서야 내 생각이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내게 좀 더 현실적인 건 고급반에서 헤매는 게 아니라 기초반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였다.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기본적인 것들부터 배워야 하는 거였다.

결국 나는 6개월 만에 완전 기초 과정으로 새롭게 등록했다. 어쨌거나 고급반에 있었으니 기초를 배우다 보면 너무 쉬워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제나 드는 생각이 있다. 초등학교 이전부터 배우는 공부도,세 살 때부터 쌓인다는 인격도,내가 하는 모델이란 직업도 기초가 중요하다. 기초를 뛰어넘고 한걸음에 올라서려 하면 망가져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가 톱 모델을 꿈꾸며 기초부터 다졌던 것처럼 요리도 걸음마부터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지난 6개월이 벅찼지만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지금부터 기초 과정을 밟고 나면 내 책장엔 멋진 레시피가 가지런히 꽂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쯤 그 맛있는 음식을 누가 먹게 될지…. 그 사람은 행운아 ㅎㅎ . 기초야 미안해. 다음 주에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