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Art] 美‥황혼기에 꽃피운 박생광의 작품세계

무당굿·탈춤·십장생… 전통 한국美에 色의 마술을 입히다
천재화가 내고(乃古) 박생광(1904~1985년)은 '한국 전통 색채의 마술사' 혹은 '민족 혼의 화가'라고 평가받는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의 화두는 '전통성 회복'이었다. 일평생 화풍 역시 전통 본연의 혼을 쫓되 어떠한 형식이나 수법에 얽매이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유롭게 재해석된 그만의 독자적인 표현방법은 '전통 한국미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자유로운 찬미'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박 화백이 처음부터 '민족 혼의 화가'로 불린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한때 채색기법이 일본적인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경남 진주 태생인 그는 1920년 17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해방될 때까지 그 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광복과 함께 귀국한다. 하지만 한국 화단은 그를 반기지 않았다. 너무나 혼란한 시대적 상황과 일본회화 배척운동이 극에 달했던 화단의 현실 때문이었다. 박 화백이 작품을 통해 전하려고 했던 진정성이 만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화가 박생광의 일생에서 하이라이트는 말년의 10년이었다.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팔순,1980년 전후에 보여준 박생광의 놀랍고 대담한 예술적 변신은 아직도 한국 현대미술사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의 나이 79세 되던 1982년 혜초의 길을 따라 인도 성지순례와 평소 갈망하던 파리 여행까지 다녀온다. 여행을 계기로 그의 작품은 좀 더 깊이를 더한다. 불교적이면서도 영적인 교감 그리고 영혼성이 깃든 색채가 두드러진다. 그는 당시 "남은 생명의 등불을 초연한 자연으로서 전신(傅神)의 경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흔히 박 화백의 작품은 '우리 눈에 쉽게 띄지는 않지만 우리와 가까이 있는 주제'를 주로 담고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가령 오랜 민속신앙의 무당굿을 비롯해 서민층 삶의 탈춤놀이,해학적인 탈바가지,불교적 장식미,불상의 정신적 이미지,십장생의 재해석 등이다. 이들 각 형상의 외곽마다 강렬한 붉은 선을 둘러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이는 특유의 평면성과 장식성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듯 원색조로 마무리한 채색법은 한국미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전통 오방색(五方色)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1983년작 '나녀4'는 바로 그의 전성기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벌거벗은 두 여인의 요염한 포즈가 무척 흥미롭다. 울긋불긋 화려한 바탕색과 붉은 색 외곽선으로 따낸 인물형상 처리가 환상적인 대조를 이룬다. 마치 백옥처럼 흰 여인의 풍만한 몸매를 과시하려는 듯하다.

특히 흐물흐물한 신체의 선묘는 어떤가. 여인들의 나른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화면 뒤쪽에 십장생의 공간배치 역시 눈길을 붙잡는다. 한 쌍의 사슴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이 물결 위에 올라서 있다. 한 여인은 영지를 입에 문 사슴과 야릇한 시선을 교환한다. 이를 지켜보는 뒤쪽의 사슴은 질투어린 눈빛이 역력하다. 하지만 또 다른 여인은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상대방의 허벅지를 간질이느라 여념이 없다. 같은 해에 그린 '명성황후'나 '청담조사(靑潭祖師)' '혜초(慧超)'등의 역사 인물뿐만 아니라 힌두교에 나타난 고도의 관능미와 현란한 장식성의 특징들을 담아낸 '인도'시리즈들도 주목받는 작품들이다.

박 화백은 1983년 어록에 "최근 내가 의식적으로 한국적 시리즈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혹자는 구태의연하다고 하나,나는 그것이 바로 나의 진실된 현대화라고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이때부터 '그대로'라는 한글 호를 사용한다. 이처럼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했다.

그래서일까. 박 화백을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과 곧잘 비유한다. 실제로 둘은 서로 만날 뻔 했다. 1984년 10월, 프랑스미술가협회 오트리브(Aranud d' Hauterives) 회장이 수유리 자택 겸 작업실로 방문한다. 이때 박 화백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듬해 5월 그랑팔레 한국특별전 '르살롱-85'의 초대작가로 초청, 샤갈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약속을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우하기 직전 3월에 샤갈이 먼저 타계해 불발됐다. 그래도 박생광은 이 전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유럽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확실히 하나의 새로운 회화를 만들었다. 제대로 된 한국화가 어떤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깊숙한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그가 피워낸 새롭고 창의적인 꽃은 너무나 현대적이다. 비록 일본에서 화가의 길을 시작했지만,오히려 그 시대에 말살됐던 한민족의 영혼을 불러냈다.

신장 155cm의 작은 거인 박생광.그는 잠들었던 '우리다운 정체성'을 작품으로 일깨워준 진정한 '화단의 큰 무당'이었다. 서울 관훈동 갤러리 이즈의 개관 1주년 기념전(8~21일)에서는 박 화백의 '나녀4'를 비롯해 '모란과 나비''문''민속도' 등을 만날 수 있다.

/김윤섭 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ㆍ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