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들리는 영국 왕실…의회에 '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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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직접 "경비 올려달라""왕실 재정난이 심각하다. 왕실경비를 올려달라."(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정부 재정난도 심각하다. 버킹엄 궁전 개방 시간을 늘려 관광수입으로 적자를 메워라."(영국 하원공공회계위원회)
의회 "스스로 해결하라" 거절
"불황에 혈세로 사치" 비판도
적자에 시달리는 영국 왕실이 체면을 구겼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83)이 직접 의회에 정부가 매년 왕실에 지급하는 왕실비를 상향 조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경제난에 허덕이는 데다 올해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12.3%(1750억파운드)에 달할 정도로 나라 곳간이 비었다는 게 이유다.
◆왕실경비 20년째 동결
영국 본토를 비롯,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자메이카 파푸아뉴기니 등 세계 16개 주권국가를 거느리는 '영연방 왕국'의 살림이 팍팍해지고 있다. 영국 왕실이 최근 발표한 왕실재정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 왕실은 △직원 봉급(990만파운드) △식음료 · 숙박(110만파운드) △가사 · 가구 구입(70만파운드) 등에 1390만파운드(약 289억원)를 썼다. 2007년에 비해 120만파운드 증가했다. 이 중 영국 재무부로부터 지급받은 왕실경비는 790만파운드에 그친다. 부족한 600만파운드는 왕실 소유 지대 및 투자수익을 기반으로 한 예비비로 충당했다.
1990년 당시 총리인 존 메이저는 20년간 왕실경비를 동결했다. 원칙상 내년 말에나 왕실경비 증액 요청이 가능한 셈이다. 하지만 왕실 예비비가 2000년 3500만파운드에서 현재 2100만파운드로 쪼그라들자 여왕이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의회에 왕실경비 인상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왕실 재정 전문가에 따르면 현 수준의 씀씀이를 유지하려면 정부로부터 받는 왕실경비는 현재 790만파운드의 두 배가 넘는 2000만파운드 정도는 돼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왕실 여행비,버킹엄궁 유지 · 관리비 등을 포함한 지난해 영국 왕실의 총 지출은 4150만파운드(약 864억원)에 달했다.
◆왕실 사치 문화 사라지나
하지만 여왕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정부 지급 액수가 적은 게 아니라 왕실의 고질적인 낭비벽이 왕실 재정을 악화시켰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가 쓴 여행비는 131만669파운드(약 27억원)에 달했다. 작년 6월 여왕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사원을 방문할 때 전세기 비용으로만 1만1258파운드를 지출했다. 영국 국민 평균 월급 6개월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일간 더 타임스는'이제 왕실이 세금으로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시대는 지났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더 헤럴드는 지난해 왕실의 부동산 등 지대 수입만 2억1140만파운드에 달하는데 돈이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19~20세기 왕실의 허례허식에 관대했던 전통이 경기침체와 맞물리면서 사라지고 있는 것도 비판에 불을 댕겼다고 풀이했다. 과거 식민지 개척과 산업화를 주도한 영국 왕실은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아우르는 상징성을 갖추기 위해 화려한 왕실 문화를 추구했다. 영국 언론들은 왕실이 계속해서 초호화판 생활을 고집한다면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을 맞는 2012년엔 왕실 재산마저 바닥날 것이라고 비꼬았다.
김미희 기자 icii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