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노숙자 경제학

국가발전 부산물…경기 바로미터, 한국 통계조차 없어 관심 높여야
꼭 열흘 전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장 보따리를 정거장 벤치에 놓아둔 채 시내버스를 탔다. 세 정거장째에서야 그걸 깨닫고 급히 차에서 내려 거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조바심하며 걸린 시간은 30분가량,돌아간 자리에 이미 내 짐은 간 곳이 없었다.

실망 속에 5m 쯤 떨어진 곳에 진치고 있던 노숙자를 보니 그 앞에 우리 비닐봉지가 보이지 않는가? 17달러 주고 산 액자가 들어 있는 그 봉지에는 푸른색 상호가 선명해 금방 내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 내 것 같다"고 하자 그 노숙자는 좀 험한 표정은 지었으나 별 상대는 하지 않았다. 그 봉지를 집어 들고 나는 고맙다는 표시로 그에게 1달러짜리 한 장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그 지폐를 반으로 찢고,그걸 두 번 더 찢어 하늘에 날렸다. 그날 내내,그리고 지금도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아마 그에게는 돈 한두 푼이 이미 아무 쓸모도 없었을 것이라고….내가 건네준 1달러는 그의 가슴 속 오랜 분노 같은 것을 순간적으로 일깨웠고,그 노여움이 돈을 찢어버리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와이에는 전에 없이 노숙자가 많아 보였다. 주요 버스 정거장에는 물론,와이키키 해변에도 여럿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 보니 올 여름의 와이키키에는 '빈 방 있음'을 내건 호텔들이 몇이나 눈에 띄었는데,전에 없던 7월 말 풍경처럼 느껴졌다. 경기 침체로 하와이 관광객은 상당히 줄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아마 흔해진 노숙자들 역시 관광객 줄이기에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때마침 지난 8일 한 언론사는 미국에서의 노숙자 공격사건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를 인용한 이 기사를 보면,지난 6일 할리우드에서 노숙자에 대한 연쇄 폭력사건이 일어나 2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미국노숙자연맹의 발표를 보면,최근 10년 동안 노숙자에 대한 공격 사건은 최소 880건,이로 인한 사망이 224명이다. 노숙자 사이의 폭력도 있었지만,노숙자 아닌 사람들이 이유없이 노숙자들을 공격한 경우였다. 미국에서 경기침체로 노숙자들이 100만명이 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행위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주 정부가 이런 폭행을 엄벌하려는 움직임도 보도됐다. 이 기사에 보이는 미국의 노숙자 100만명이란 통계는 추측성이 높아 정확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2005년 1월의 어느 하루 노숙자 수는 74만4313명이었고,2006년 1월의 같은 추계로는 67만1888명이었다는 보도도 있다. 같은 무렵 1년 동안 노숙자 누계는 158만명이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경우도 노숙자수는 상당해서 30만명 전후,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증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1997년 경제위기 이후 2001년 3900명이었다는 추계가 보이지만,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크게 늘어났을 것 같다. 선진국의 경우도 노숙자 문제는 이제 겨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빈곤,가정폭력,마약과 알콜,정신질환 등으로 분석한다거나,흑인과 백인 등 인종적 노숙자 분포도 조사되는 등 학문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987년 한파로 수많은 노숙자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미국에서는 노숙자지원법이 생겼지만,그후 후속 입법에는 성과가 없는 듯하다.

2005년 유엔인권위 보고서에 의하면 지금 전 세계 노숙자는 1억명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노숙자들의 숙식에 관심을 보이는 단체들이 조금 생겨나고 있지만,노숙자 문제에 우리 모두 관심을 높여야 할 때가 됐다. 역설적이지만,노숙자는 선진화의 지표가 될 정도로 국가 발전의 필연적 부산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박성래 <한국외대 명예교수ㆍ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