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경영 업그레이드'] 난초와 잡초

제도가 바뀌면 시장이 변한다. 어제의 1등이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 게임의 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신 어제의 패자에게도 기회가 생긴다.

제도 뿐 아니다. 주도 기술과 미디어가 바뀌어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바람을 잘 타서 혁신에 성공한 기업이 갑자기 나타나고, 큰 물결에 눈 감았다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회사들도 늘어난다. 신기술이자 새로운 주도 미디어인 인터넷이 상용화된 지 20년이 채 안 돼 전 세계적인 부의 재편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을 우리는 목격하고있다. 이처럼 많은 신생기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나 또 그 가운데 상당수가 몇 년 만에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서는 일도 예전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부의 재편시대에는 성공의 키워드가 달라진다. 이즈음의 성공코드는 바로 적응, 그것도 아주 빠른 적응이다. 기술변화 사이클이 짧아지고 업종을 넘나드는 경쟁이 벌어지는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오히려 과거의 성공이다. 과거의 성공경험을 우상화해서 그 경험이 어디서든지 또 통하리라고 믿는 것을 휴브리스(hubris:오만)라고 한다. 기존 기업들이 휴브리스에 빠져 적응의 필요성을 잊고 있을 때 이제 막 생긴 기업이 달려나간다. 신생기업은 휴브리스를 가질 만한 성공경험이 없기 때문에 새롭게 변신하며 그 결과 신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까탈스럽고 고집스런 난초 같은 기업을 제치고 언제 어디서나 살아남을 수 있는 잡초 같은 회사가 기회를 잡는 험한 시대에 우리는 산다.

당장 우리 주변의 사례로 은행과 보험사를 비교해보자. 올 들어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서 은행 보험 증권 카드사 등을 가르고 있던 업종의 벽이 무너졌다. 전체 성과는 여러가지로 비교해야겠지만 우선 은행원과 보험맨 가운데 누가 상품영업을 더 잘할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은행은 앉아서 손님을 받아왔지만, 보험은 새 손님을 찾아다녔다. 학교 동창을 만나면 은행원들은 대출부탁을 받았고, 보험맨들은 보험 들어달라고 허리를 굽혔다. 은행이 농민적 근면성을 자랑한다면 보험은 유목적 저돌성이 무기였다. 은행원은 난초요,보험맨은 잡초라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공무원과 회사원을 비교해봐도 다를 바 없다. 오래 근무할 수 있다고 경쟁력이 그 세월만큼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중년 창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회사에서 일찍 '잘린' 사람들이다. 최근 10년 사이 세상을 놀라게 한 벤처기업들은 처음에는 모두 잡초였다. 돈 버는 것은 고사하고 생존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야근을 밥먹듯했다는 창업 초기 역사는 전 세계 공통이다. 그 절실함이 뚜렷한 목표를 갖고 전진할 수 있는 동기가 됐다. 거대 기업은 아무리 경영자가 외쳐도 생존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잡초에서 볼 수 있다.

험한 시절에는 고고한 난초가 아니라 터프한 잡초가 돼야 옳다. 팔기 위해서는 기다리지 말고 가고, 오지 말라고 해도 가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어도 팔리지 않으면 실패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연구를 위한 연구, 공급자 중심의 상품기획 같은 대기업병도 쓸어버릴 수 있다. 경영의 키워드를 봐도 생산의 시대, 마케팅의 시대 다음은 바로 영업과 세일즈의 시대다. 거친 생명력이 성공키워드가 됐다.

권영설 한경 아카데미 원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