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조환익 사장 '초가집도 그의 손을 거치면 기와집이 된다'

근성·아이디어 중무장 '샌님탈 쓴 통상거인'
조환익 KOTRA 사장은 2007년 어느날 소포 하나를 받아들었다. 평소 존경하던 중견 수출업체 박성환 회장이 보낸 것이었다. 내용물은 달랑 액자 하나였다. 액자에는 오래 전 명함이 한 장 들어있었다.

'상공부 아주통상과 과장 대리 조환익'이라고 찍힌 부분의 직책란에 빨간 사인펜으로 두 줄을 긋고,그 자리를 '통상총괄과 행정사무관'으로 바꿔쓴 명함이었다. 박 회장은 "20여년 전 당신으로부터 받았던 명함을 보관해오다 기념이 될만하다고 생각해 보낸다"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했다. 사연은 이랬다. 조 사장이 통상총괄과 사무관으로 근무할 때 아주통상과 과장자리가 공석이 됐다. 당시 금진호 차관은 그를 서기관으로 승진시켜 과장자리에 앉힐 생각으로 명함을 파줬다. 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선배들보다 먼저 승진하면 조직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죽을지언정…' 족제비론

3개월 후 금 차관은 다시 과장자리를 마련해 조환익 사무관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같은 이유로 두 번째 승진도 사절했다. 아끼는 후배가 잇따라 제밥그릇을 걷어차자 금 차관은 "인사는 내가 하지,자네가 하는 거냐.앞으로 승진은 꿈도 꾸지 말라"고 역정을 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금 차관의 호의(?)를 거부한 탓인지 그의 이후 공직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아마 미주통상과장으로 근무할 때 정도가 마음껏 일한 시절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당시 오영호(현 무역협회 부회장),박인구(동원그룹 부회장) 사무관 등 후배들과 '통상 트로이카'로 불리며 슈퍼 301조 등 미국과 얽힌 굵직한 통상 현안들을 원만하게 풀었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아 1990년부터 3년간 청와대에서 근무했지만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청와대 근무는 국장 승진 코스로 통했지만,이번에는 선배들이 막았다. '후배가 먼저 승진하는 법은 없다'며 청와대에 항의한 것이다.

이후 2년 가까이 대전엑스포조직위원회 등을 돌며 '인공위성'으로 불리는 본부 바깥 생활을 했다. "빨리 본부에 들어가 일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때를 기다리는 것도 이때 배운 것 같다"는 게 그의 회고다. 시련은 1998년에도 이어졌다. 당시 과천에서 그의 차관보 승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경수로 책임기획단장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산자부 차관보가 됐지만 그 자리를 1년쯤 뒤 다시 걷어차고 나왔다. '침체된 산자부 분위기를 살리고 후배에게 자리를 터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공직의 우여곡절에 대해 그는 '족제비론'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족제비는 털이 워낙 귀합니다. 그래서 총포를 사용해 잡지 않습니다. 대신 산꼭대기 막다른 곳에 오물구덩이를 파 놓고 아래서부터 몰아대면 족제비가 온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구덩이 앞에 꼿꼿하게 서 있어요. 그때 맨손으로 잡습니다. " 죽을지언정 털을 더럽힐 수는 없다는 게 족제비 근성이라는 설명이었다.

◆수줍은 많은 서울 토박이

강단 있게 살아온 조 사장이지만 인상은 딴판이다. 주위의 표현을 빌리면 '수줍음 많은 서울 촌놈'의 인상이다. 초등학교 졸업반 때 경기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실패했다. 체육점수 미달 때문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맛본 첫 번째 패배였다. 부끄러웠다. 다음해 또 도전했지만 다시 낙방했다. 세 번의 시험 끝에 중앙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학교 입학 후에도 그는 통학 버스에서 이웃집 동년배들을 발견하면 뒷문으로 슬쩍 내리곤 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나이는 같지만 2년이나 선배인 그들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엄한 가풍도 그를 더욱 짓눌렀다. 밥을 먹을 때면 "입 다물고 먹어라"는 말을 늘 들어야 했던 조 사장은 지금도 사적인 자리에선 남들보다 밥을 훨씬 빨리 먹을 정도다.

청소년기엔 이런 자신이 싫었다. 그때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친구를 만났다. 훗날 4전5기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권투선수 홍수환이다. 고등학교 같은 반에서 만난 홍씨를 보며 그는 권투를 통해 성격을 고쳐가기로 결심하고 권투에 입문했다. 때마침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다. 고교 시절 1년여간 권투를 통해 수줍은 소년의 이미지를 벗어갔다고 말한다.

◆꼴찌의 경험은 조직을 살리고

애초 그의 꿈은 문인(文人)이었다. 고교 시절 전국 백일장에서 입상했고 196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서는 3선 개헌 반대 선언문을 쓸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대로 관료를 지낸 집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증조부는 고종 황제의 승지를 지냈고,국회의장을 역임한 해공 신익희 선생은 조모의 삼촌이다. 조부와 부친도 공직에 몸담았었다. 그는 문인의 꿈을 접고 대학 4학년 때 공무원 길로 들어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3년 만에 그는 행시 14회로 합격했다. 하지만 성적은 좋지 않았다. 커트라인이었던 56점에 겨우 턱걸이했다. 하지만 이 경험은 큰 자산이 됐다. 그는 "경영자로서의 감각은 아마도 꼴찌의 경험에서 온 것 같다"고 말한다. '꼴찌 근성'으로 똘똘 뭉친 조환익은 가는 곳마다 조직을 키워냈다.

차관보에서 물러난 뒤 맡은 산업기술재단(현 산업기술진흥원)은 겨우 직원 18명에 1년 예산은 10억원뿐인 조직이었다. 그는 이 조직을 2년반 만에 4000억원의 예산을 받는 거대 기관으로 성장시켰다. 이어 수출보험공사로 옮겨 매출 130억원에서 10배에 가까운 1200억원의 회사로 만들었다.

'꼴찌 근성'은 쓰러질 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KOTRA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취임했을 때 이례적인 고강도 감사로 직원들은 마치 수출 실적을 부풀린 '사기꾼' 취급을 받아왔다. 그는 그 골짜기를 벗어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직원들에게 "우리가 먼저 변해야 산다"며 모든 관행을 뒤집어 버렸다. 인사 청탁을 하는 직원들에게 확실한 불이익을 줬고 현지인과 종합상사 출신 민간인을 해외 센터장에 임명해 조직 내 명분 없는 순혈주의에도 경종을 울렸다. KOTRA 창사 이래 수십년간 써오던 '무역관'이라는 명칭을 '코리아비즈니스센터'로 바꿔버렸다. '관(官)'의 냄새를 지우고 확실한 민간 지원기관으로의 변신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KOTRA 사장 취임 1년여 만인 지난 7월,그는 공기업 기관장 평가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았다.

그는 단점도 잘 알고 있다. "늘 전시처럼 살아오다 보니 경쟁에서 살아남는 직원들 위주로 조직을 꾸려왔다. 위기엔 효과적이지만 오래 지속되면 조직이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것.

◆일벌레와 아이디어맨

그는 아이디어맨으로도 유명하다. 올해 초 '바이코리아 2009'를 준비할 때다. 실무팀이 조 사장에게 최종 결재를 받으러 갔다. "예상보다 해외 바이어들이 엄청나게 많이 온다고 합니다. 빅(big) 바이어도 꽤 됩니다. 중국산(産)은 못 믿겠고,일본산은 비싸다는 게 이유입니다. " 조환익은 답했다. "그래? 역(逆)샌드위치구먼.이걸로 갑시다. "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약진하는 한국 경제의 모습을 잘 표현한 '역샌드위치론'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는 과거 수출보험공사 시절에는 '돈 수출'이라는 용어도 만들어냈다.

이런 아이디어는 그의 일에 대한 집착과 학습에서 나온다. 그는 지금도 일주일에 책 두세 권은 거뜬히 읽어낸다. 일벌레가 휴식으로 쉼없이 책을 읽어대니 많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일에 대한 그의 집착은 부인이 보낸 편지에도 나타난다. 그의 부인은 편지에서 "당신과 대화한 지 오래됐습니다. 용수철처럼 새벽에 튀어나가는 당신은 아내에게는 입과 귀가 없는 남편이고 아이들에게는 소리 없이 들어와 새벽에 유령처럼 사라지는 아빠"라고 표현했다. 조환익은 "당시 그 편지가 연애편지였는지 경고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레드카드를 받지 않은 것은 일단 다행"이라고 말한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