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타임 투 킬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 소도시.인종차별이 심한 곳에서 술과 마약에 취한 백인 남성들이 길 가던 10살짜리 흑인 소녀를 성폭행하고 마구 때려 만신창이를 만든 다음 강에 던진다. 아이는 구출되지만 영구 불임이 되는데 범인들은 백인 위주 재판부에 의해 석방될 상태에 놓인다.

형식적 재판이라고 생각,반성의 기미 없이 법정으로 들어서는 범인들을 향해 아이 아버지는 총을 쏜다. 범인은 죽고 경찰도 다친다. 현장에서 체포된 아버지는 백인 변호사 제이크에게 변호를 의뢰한다. 고민하던 제이크는 잠자는 딸의 모습을 본 뒤 사건을 맡기로 결심한다. 제이크에겐 방화와 테러 등 온갖 협박이 가해지고 아내는 그런 상황에서도 사건을 포기하지 않는 남편을 원망한다. 가족은 피신시키지만 그를 돕던 조수 엘렌은 납치돼 폭행당한다. 판결을 앞둔 순간 그는 배심원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 다음 사건 당시 정황을 재연하곤 말한다.

"이제 그 소녀를 백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당신의 딸이,당신의 부인이,당신의 어머니가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주십시오." 결과는 무죄.

존 그리샴 원작 '타임 투 킬(A Time To Kill,1996)'의 개요다. 영화는 아동 성폭행과 인종차별 문제를 함께 제기,화제가 됐다. 명백한 살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건 여론 재판이란 리뷰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배심원들은 "당신의 딸이라면"이라는 대목에 무죄로 답했다. 뒤집으면 어린 소녀를 잔인하게 학대하고 망가뜨린 성범죄자들의 죄를 설사 죽음으로 감당했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조두순 사건'에 분노하는 이들의 심정도 영화 속 배심원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국내의 경우 어린이 대상 성범죄에 대한 처벌은 가볍다. 북미와 유럽에선 나라에 따라 물리화학적 거세까지 하는데 반해 우리는 법정 상한이 징역 15년,하한은 징역 3년 혹은 벌금 1000만~3000만원이고 공소시효도 7년에 불과하다.

그나마 대부분 집행유예나 징역 3년 미만이라는 마당이다. 형량도 형량이지만 더 큰 과제는 실질적 대책이다. 피해자가 안심하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과학적 수사로 범인을 반드시 검거하는 것,공소시효를 없애는 것,성범죄 대상이 되는 아이들을 돕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 않고 일이 터질 때마다 여기저기서 소리만 요란스레 내봤자 자칫 피해자만 더 울리기 십상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