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한방에 벌어 화끈하게 쓰고 싶다"…바뀌는 '돈에 대한 코드'

제일기획 '소비자보고서'
"미국인의 돈에 대한 코드는 증거(proof)다. "

마케팅 전문가인 클로테르 라파이유가 '컬처 코드'란 책에서 한 말이다. 미국인들에게 돈은 단순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레코드와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돈을 얼마나 모았나 하는 것은 그가 이룬 업적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돈 그 자체보다는 한 인간의 성취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문화적 코드 때문에 미국에는 다른 나라보다 수십억,수백억원의 연봉을 받는 경영자들이 더 많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돈에 대한 코드는 무엇일까. 제일기획이 최근 발간한 소비자 보고서는 그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제일기획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한국인의 금융에 대한 인식변화를 추적했다. 이 조사는 전국 2500~7000명을 대상으로 20여년간 실시되고 있다.

◆베팅하는 한국인

지난 10년간 재산증식에 대한 관심은 계속 증가추세를 보였다. '재산증식이 가장 관심 있는 개인문제다'라는 문항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1998년 16%에서 2008년 27%로 증가했다. 연령대별로는 20대에 외환위기를 맛본 30대 중 42%가 가장 큰 관심사로 재산증식을 꼽았다. 이와 관련,'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하다'는 문항에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가 2000년 67%에서 작년 79%로 높아졌다. IMF(국제통화기금)체제라는 풍파를 거치면서 다른 사회적 가치나 성취보다 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일면 당연하다는 평가다. 특이한 것은 재산증식 방식에 대한 응답자들의 태도다. 재산증식에 관심이 높아진 만큼 어떤 과정을 통해 얼마를 모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늘었을 것 같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재산증식을 위해 저축과 투자를 미리 계획하고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응답은 2000년 40%에서 작년에는 오히려 34%로 내려앉았다. 한마디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차곡차곡 준비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다른 것,또는 한방을 기대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투자에 대한 인식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1999년에는 '수익성은 낮아도 안정성 있는 금융상품이 좋다'는 응답이 전체의 63% 수준에 달했다. 은행에 저축하고 그 이자로 재산을 불려나가는 데 익숙했던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지만 이 비율은 10년이 지나면서 52%로 내려앉았다. 모든 연령대에서 안정적 상품을 선호하는 비중이 크게 하락했다. 특히 19세에서 29세까지는 그 비중이 50%를 밑돌았다. 점점 더 위험성 높은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증권상품은 리스크 감수증권가에서는 2006년 이후 펀드 열풍이 불어 간접투자자가 늘어난 것과 관련,스스로 리스크를 감수하겠다는 성향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도 나온다. 직접 주식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좀 낫다는 것이다. 간접투자를 이용하는 비율은 2000년 2%에서 작년 12%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투자한 상품은 대부분 시황에 따라 크게 움직이는 '주식형 펀드(액티브 펀드)'였다. 액티브 펀드는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위험상품으로 분류하고 있다. 차문현 유리자산운용 사장은 "미국 등 펀드 선진국에서는 주가지수의 변화만큼만 안정적 수익을 올리는 인덱스 펀드 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투자문화 때문에 인덱스 펀드 대중화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미국에서 자산운용사 역할은 투자자와 함께 차근차근 재산을 불려가는 '파트너'라는 개념이 정착됐지만 한국에서 자산운용사는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투자 대리인'의 성격이 강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런 문화는 주가가 급락했던 지난해 조사결과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재산증식을 위해 다소의 위험은 어쩔 수 없다고 답한 응답자가 1999년 23%에서 작년 36%로 크게 증가했다. '리스크 테이커(risk-taker)'의 성향이 더 강해졌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험은 안 들고 소비는 과감히한국인들이 미래를 불안해하지만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는 모습은 보험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노후보장을 위해 보험 가입 등 구체적 준비를 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1998년 47%에서 작년에는 36%로 내려앉았다.

이에 따라 보험가입률도 1998년 68%에서 2003년 81%까지 높아졌지만 작년에는 73% 수준까지 후퇴했다. 종신보험 가입률도 2005년을 정점으로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보험을 가입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도 10년 전 26%에서 작년 28%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반면 소비에 대한 태도는 더욱 과감해졌다. '생활을 즐기기 위해 어느 정도 낭비는 필요하다'는 응답은 1998년 40%에서 작년 47%로 증가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