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이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를 웃돈다고 하고 대통령 스스로도 국정의 자신감을 얻은 모습이 확연하다. 취임 몇 달도 안 돼 '촛불'에 발목 잡혀 20%에 못 미칠 정도로 지지율이 추락했던 상황에 비추면 대단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지지율이라는 것이 별로 믿을 바 못되고 어느 순간 바뀌는 게 민심이지만,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그 자체로서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동력임에 분명하다.

지지율 회복의 요인은 여러 가지로 얘기된다. 대통령이 잘해서라기보다 경제위기 이후 비교적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경기호전에 대한 기대감이 지지율과 상관관계를 이룬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도 중도실용주의를 앞세운 이 대통령의 친(親)서민 행보를 첫손 꼽아야 할 것이다. 서민들이 살아가는 시장터와 중소기업들을 빈번히 찾아가 함께 부대끼려 하는 대통령의 스킨십,미소(美少)금융,보금자리주택 등 소외된 약자계층을 배려하기 위한 서민지원 정책들이 멀어졌던 국민들의 마음을 되돌렸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포퓰리즘이니,이념적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어쨌든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국민 다수가 '중도실용'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념적 용어로서의 '중도'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는 물론 탈(脫)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에 쏠린 민심이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정치라는 게 매사에 양 극단의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 편가르기하고 대립의 긴장만 조성해 국민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국민생활을 두루 편안하게 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일깨워준 것에 다름 아니다.

이념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난달 독일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긴 것을 두고 색깔을 나눈다. 유럽이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 이어 독일까지 본격적인 '우향우'의 시대로 들어섰다고 하고,메르켈의 진보적 정책을 들어 좌파의 이념적 승리라고 우기는 쪽도 있다. 다들 편리한 대로의 해석이다.

이를 굳이 좌우의 이분법에 따른 이념적 선택으로 봐야 할까. 오히려 메르켈이 내세운 구호는 '중도(die mitte)'였다. 정책 또한 소득세 인하와 법인 · 상속세 개혁은 우파 방식이고,은행 국유화,노동시장 유연화 반대,복지 확대는 좌파적이다. 이처럼 좌우를 넘나드는 정책 코드가 '실용'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 이념의 본산인 유럽에서도 좌우 경계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1997년부터 10년 동안 장기집권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대표적이다. 좌파 노동당 정권이었음에도 그는 과거 마거릿 대처의 우파 보수당 노선이었던 복지예산 축소,노조 파업의 제한,노동시장 유연성 강화,공공지출 축소,법인세 감면 등의 정책을 계승했고,노동당의 금기였던 국영기업 민영화와 사회보장제도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로 인해 '바지 입은 대처리즘'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그것이 블레어를 가장 성공한 영국 총리의 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아이러니다.

그 블레어 정책의 이론적 기틀이 바로 앤서니 기든스가 제시한 '제3의 길'이었다. 기든스는 "좌파와 우파가 다른 점은 단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아가는 길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의 차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시대착오적인 좌우이념이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겨우 몇몇 사람들이 왼쪽 오른쪽의 독단에 빠진 사시(斜視)로 세상을 보고 국민들의 삶과 무관한 논쟁만 확대재생산하면서 자신들만이 시대정신을 이끈다고 착각하지만,실상 국민이 원하는 것은 그런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구체적 이득이다. 결국 국민에겐 등 따습고 배부른 것이 최선이라는 얘기다. 이념의 미망(迷妄)을 털어버려야 그 길이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진정한 실용은 거기에 있다.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