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매니저의 투자비밀③]운용업계'선덕여왕'…여성 본부장 1호 김유경 알리안츠GI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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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가지 않는 길만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국내에서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자산운용회사 주식운용본부장이 된 김유경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알리안츠GI) 자산운용 이사(41ㆍ사진). 그는 성공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남들이 가지 않은 가시밭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온 결과"라고 말했다.부드러운 인상에 작고 아담한 체구 그리고 단정한 단발머리. 그의 첫 인상은 말그대로 '선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인식은 10분도 지나지 않아 깨졌다. 늦은 오후였지만 그의 모습에서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의 온라인미디어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오히려 힘이 넘쳤다. 날카로운 눈이 번뜩일 때마다 매서움마저 느껴졌다.
알리안츠GI는 독일 최대의 금융그룹인 알리안츠그룹의 자산운용사다. 깐깐한 것으로 알려진 이 독일계 회사가 지난 2일 입사 2년을 갓 넘긴 김 이사를 주식운용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국내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이 된 것이다.주식운용을 주로하는 자산운용사에서 주식운용본부장은 펀드매니저의 왕이나 다름없다. 김 이사가 처음으로 여왕이 됐으니 선덕여왕과도 비교될 만하다.
김 이사는 알리안츠GI에서 그동안 국민연금이 위탁한 자금만 운용했다. 겉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는 자산운용업계에서 '흙 속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종목을 선택하는 감각이 뛰어나 시장을 웃도는 운용성과를 내왔다.
덕분에 알리안츠GI는 매년 국민연금 위탁운용 자산운용사로 선정되고 있다. 그런 그가 주식운용본부장이 되면서 국민연금 위탁운용자금과 일임매매 등을 포함해 총 1조1600억원(2009년 10월23일 기준)을 운용하는 큰 손이 됐다.◆평범한 식품영양과 학생, 회계통(通)으로 그리고 펀드매니저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유학길부터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식품영양학을 마다하고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트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과정을 공부했다. 학위를 받아와 국내에서 취직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김 이사의 눈에는 들어온 분야는 따로 있었다. 바로 '회계학'이었다. 현지 학생들이 회계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회계공부를 회피하는 것을 보고 '저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 학생들이 쉽게 암산할 수 있는 계산도 외국학생들은 어려워 하더라구요. 한국 사람들은 계산이나 어려운 문제도 끈기있게 붙잡고 끝까지 풀어 나가잖아요. 그래서 도전해야겠다 싶어서 회계학 과정으로 옮겼습니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분야를 선택한다면 그만큼 경쟁력도 지닐 수 있게 되니까요."공인회계사(CPA) 자격증을 따낸 김 이사는 귀국 후인 1996년 교보투자신탁운용(현재 교보악사자산운용)의 채용공고를 접하게 됐다. 원서를 내고 합격하면서 펀드매니저의 길을 걷게 됐다. 입사 초기에는 리서치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규모가 작지만 펀드운용을 맡기 시작했다.
"그 때는 경력이 쌓이지 않아서 그런지 지금으로 보면 '자투리 펀드'들을 주로 운용했습니다. 그런데 펀드 수가 많아지다보니 운용 이외에 신경 쓸 부분들이 많아지더라구요. 10억원짜리 펀드를 10개 맡는 것보다 100억원 펀드 1개를 운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1998년께. 김 이사는 주로 작은 규모의 사모펀드를 운용했다. 운용하는 펀드수가 28개에 달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기관들은 사모펀드 유치에 매달렸던 시기였다. 펀드매니저들은 큰 펀드보다는 수많은 작은 펀드들을 감당해야 했다. 김 이사가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에 펀드매니저들이 업계는 물론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였어요. 애널리스트들도 그랬구요. 더군다나 여성이다보니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하든지 해서 언론에 한 번 나서보라'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얼굴 알려지면 일이 더 수월해지는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점(여성이라는 점)이 부각되다보면 오히려 실력이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력으로 나를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나서지 않았어요."김 이사는 화려한 조명을 받고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여성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마다했다. 포장된 겉모습이 실력의 거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다른 펀드매니저들은 얼굴을 알리고 연봉을 높여가며 회사를 옮겨 다녔다. 그러나 김 이사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동시에 그 만의 독특한 운용철학도 서서히 자리잡게 됐다. 쉬운 길이 아닌 또다른 가시밭길을 선택한 셈이다.
"기업들을 분석하다 보니 '두가지 원칙'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영업이익의 양과 질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종목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는 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요즘 광고 문구 중에 'See the unseen.(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라는 말 있죠? 그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네요."
매출액이나 이익이 늘고 있는 지 여부 등 기업의 외형도 중요하지만 그 속내용도 꼼꼼히 살피라는 것. 그는 심지어 경영진의 경영전략이나 직원에 대한 대우 등까지도 주요 사항으로 점검한다. 회사가 미래를 위해 어떤 투자를 하는 지, 임직원이 어떤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 잠재력을 파악하는 기준은 절대 비밀이란다.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숨겨진 성장주에 투자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구체적인 종목은 얘기할수 없습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조정합니다. 기업에 대한 투자여부를 결정할 때에는 기업의 핵심내용을 최대한 '단순화'한 뒤 판단합니다."
김 이사는 기업내용을 단순화하기 위해 1장 짜리 리포트에 기업의 경영현황, 경영전략, 전망 등을 담아서 정리해놓는다. 핵심사항을 정리한 요약 리포트를 자신만의 판단지표로 삼는다.
"펀드매니저를 하다보면 주위에는 정말 수많은 정보와 얘기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너무 많이 접하면 오히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저는 한가롭게 다른 사람의 여러 생각들을 종합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에 이 회사의 1년 뒤, 3년뒤의 모습을 전망하고 핵심 경쟁력을 따져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랫동안 숙고(熟考)하는 편입니다."
◆연예인 길거리 캐스팅하듯…"똘똘한 2등을 골라라"
김 이사가 종목을 고를 때 주위에 꼭 강조하는 말이 있다. '주식시장은 미인(美人)대회가 아니다'라는 것. 내가 보기에 미인은 남들이 보기에도 미인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미인들을 골라담다 보면 결국 남들과 같은 수익을 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초과수익을 거둘수 있는, 이른바 전략종목을 고를 때에는 '미인대회의 심사위원'이 되기보다는 '연예기획사의 캐스팅 담당자'가 되라고 그는 강조한다. 처음부터 캐스팅할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어렵다면 '똘똘한 2등'에 투자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김 이사는 덧붙였다.
이같은 방법으로 주식을 운용한 결과 교보투신운용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수익률 면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까지 더해지면서 공모펀드보다는 사모펀드, 개인자금보다 법인자금과 연기금을 주로 맡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도 냈다. 2007년 8월. 김 이사는 12년간 일했던 교보를 그만두고 알리안츠GI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엔 주식운용본부에서 연금운용팀장을 맡았다.
김 이사가 이끄는 연금운용팀은 국민연금이 각 운용사에 위탁하는 자금을 꾸준히 끌어모았다. 알리안츠GI는 2007년 국민연금으로부터 사회책임투자형 자금을 위탁 받았고 올해도 이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그만큼 운용성과 등 모든 부문에서 국민연금의 신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위탁 자산운용사를 교체하거나 자산배분 차원에서 주식형 펀드에 위탁하는 자금의 비중을 줄였다. 그렇지만 알리안츠GI가 맡고 있는 위탁운용 규모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올해에도 일부 운용사들의 자금이 회수됐지만 알리안츠GI는 오히려 장기투자형 운용사로 새로 선정됐다.
국내 주식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으로부터 이처럼 신뢰를 받고 있는 비결이 뭔지, 해당펀드의 투자처와 수익률이 궁금했다. 어디에 투자했는지 구체적인 수익률이 어떤 지 몇번이고 질문했지만 대답은 '노코멘트'였다.
"국민연금의 위탁 자산운용사는 포트폴리오를 공개해서는 안됩니다. 수익률도 마찬가집니다. 최근 몇년간 대형사를 제외하고는 알리안츠GI가 꾸준히 선정되고 위탁받고 있어요. 이 점을 잘한다는 증거로 삼아주세요."
곤란해 하는 김 이사에게 더 이상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주변 취재를 통해 김 이사가 운용하는 주식형펀드가 지난해 국민연금 내 주식형 펀드에서 월등한 성과를 거뒀고, 이로인해 올해도 위탁 운용을 계속 하고 있다는 점 정도를 알 수 있었다.
한국법인인 알리안츠GI는 전직원 46명 중 17명(약 37%)이 여성이다. 여성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한국 뿐만 아니다. 알리안츠GI는 세계적으로 성별과 인종의 다양성과 다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타이완 법인의 경우 최고경영자(CEO)인 리타 후(Rita Hou), 최고마케팅책임자(CMO) 비비안 투안(Vivian Tuan) 역시 여성이다.그렇다면 국내 여성 주식운용본부장 1호로서 그가 보는 현재의 주식시장 전망은 어떨까?
"지금은 여러가지 가능성이 엇갈리는 시기입니다. 그래도 상승여력은 20~30%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다음 상승장이 올 때 치고 올라갈 종목들을 살펴봐야겠죠. 그런 회사는 지금 연구·개발(R&D) 비율이 높은 회사입니다. 올해까지 투자를 통해 준비한 기업들은 2010년에 이익이 급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기업은 업종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있습니다. 저는 정보기술(IT)이나 자동차 관련 업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후배들이여, 나를 넘어서라"
펀드운용과 시장에 얘기하다보니 문득 개인사가 궁금해졌다. '일이 애인이냐'는 질문에 싱글인 김 이사는 손사래를 쳤다. 연애도 결혼도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는게 문제다. 이제는 운용 뿐만 아니라 관리업무까지 하게 됐으니 없는 시간도 쪼개야 할 판이다.
"독신주의는 아니예요. 저도 애인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우같은 사람과 곰같은 사람으로 분류하다면 전 곰과가 더 좋아요. 이상형을 든다면 외모는 영화배우 정우성쯤으로 해둘까요?"
유쾌한 웃음 뒤에 그는 후배들을 향한 대담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김 이사는 후배들에게 공존이나 공생을 하자는 동료애 보다는, 자신을 밟고(?) 일어서라는 조언했다.
"후배들에게 저를 넘어서고 올라서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성 최초'를 위해서 일하지 않았는데, 이 타이틀을 달게 됐고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동시에 '왜 내가 처음이 됐을까?'라고 자문도 하게 되더군요. 후배들이 실력을 키우면서 포기하지 않고 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펀드매니저든 본부장이든 여성인 게 더이상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로요."
그는 투자자들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투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세요. 남의 권유나 추천에 의해서 혹은 무조건 추종하는 방식의 투자는 지양해야 합니다."김 이사는 더 이상 여성 1호라는 게 뉴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널찍한 본부장 자리를 놔두고 입사 이후 지켰던 자리에 앉았다. 언제 인터뷰를 했냐는 듯 주식운용본부장으로서 펀드매니저들을 다스리는 그는 매우 다부진 모습이었다. 시장을 살피고 다른 매니저들과 수시로 소통했다. 허례허식을 마다하는 그의 모습은 '최초' 보다 '최고'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글= 한경닷컴 김하나 기자 hana@
사진= 한경닷컴 양지웅 기자 yangdoo@
국내에서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자산운용회사 주식운용본부장이 된 김유경 알리안츠글로벌인베스터스(알리안츠GI) 자산운용 이사(41ㆍ사진). 그는 성공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남들이 가지 않은 가시밭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꾸준히 걸어온 결과"라고 말했다.부드러운 인상에 작고 아담한 체구 그리고 단정한 단발머리. 그의 첫 인상은 말그대로 '선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인식은 10분도 지나지 않아 깨졌다. 늦은 오후였지만 그의 모습에서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경제신문의 온라인미디어 <한경닷컴>과 인터뷰하는 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오히려 힘이 넘쳤다. 날카로운 눈이 번뜩일 때마다 매서움마저 느껴졌다.
알리안츠GI는 독일 최대의 금융그룹인 알리안츠그룹의 자산운용사다. 깐깐한 것으로 알려진 이 독일계 회사가 지난 2일 입사 2년을 갓 넘긴 김 이사를 주식운용본부장으로 임명했다. 국내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이 된 것이다.주식운용을 주로하는 자산운용사에서 주식운용본부장은 펀드매니저의 왕이나 다름없다. 김 이사가 처음으로 여왕이 됐으니 선덕여왕과도 비교될 만하다.
김 이사는 알리안츠GI에서 그동안 국민연금이 위탁한 자금만 운용했다. 겉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는 자산운용업계에서 '흙 속의 진주'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종목을 선택하는 감각이 뛰어나 시장을 웃도는 운용성과를 내왔다.
덕분에 알리안츠GI는 매년 국민연금 위탁운용 자산운용사로 선정되고 있다. 그런 그가 주식운용본부장이 되면서 국민연금 위탁운용자금과 일임매매 등을 포함해 총 1조1600억원(2009년 10월23일 기준)을 운용하는 큰 손이 됐다.◆평범한 식품영양과 학생, 회계통(通)으로 그리고 펀드매니저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유학길부터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식품영양학을 마다하고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트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과정을 공부했다. 학위를 받아와 국내에서 취직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김 이사의 눈에는 들어온 분야는 따로 있었다. 바로 '회계학'이었다. 현지 학생들이 회계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회계공부를 회피하는 것을 보고 '저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 학생들이 쉽게 암산할 수 있는 계산도 외국학생들은 어려워 하더라구요. 한국 사람들은 계산이나 어려운 문제도 끈기있게 붙잡고 끝까지 풀어 나가잖아요. 그래서 도전해야겠다 싶어서 회계학 과정으로 옮겼습니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분야를 선택한다면 그만큼 경쟁력도 지닐 수 있게 되니까요."공인회계사(CPA) 자격증을 따낸 김 이사는 귀국 후인 1996년 교보투자신탁운용(현재 교보악사자산운용)의 채용공고를 접하게 됐다. 원서를 내고 합격하면서 펀드매니저의 길을 걷게 됐다. 입사 초기에는 리서치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규모가 작지만 펀드운용을 맡기 시작했다.
"그 때는 경력이 쌓이지 않아서 그런지 지금으로 보면 '자투리 펀드'들을 주로 운용했습니다. 그런데 펀드 수가 많아지다보니 운용 이외에 신경 쓸 부분들이 많아지더라구요. 10억원짜리 펀드를 10개 맡는 것보다 100억원 펀드 1개를 운용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1998년께. 김 이사는 주로 작은 규모의 사모펀드를 운용했다. 운용하는 펀드수가 28개에 달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기관들은 사모펀드 유치에 매달렸던 시기였다. 펀드매니저들은 큰 펀드보다는 수많은 작은 펀드들을 감당해야 했다. 김 이사가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에 펀드매니저들이 업계는 물론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였어요. 애널리스트들도 그랬구요. 더군다나 여성이다보니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하든지 해서 언론에 한 번 나서보라'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얼굴 알려지면 일이 더 수월해지는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점(여성이라는 점)이 부각되다보면 오히려 실력이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력으로 나를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나서지 않았어요."김 이사는 화려한 조명을 받고 대중의 관심을 받는 여성 펀드매니저나 애널리스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마다했다. 포장된 겉모습이 실력의 거품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다른 펀드매니저들은 얼굴을 알리고 연봉을 높여가며 회사를 옮겨 다녔다. 그러나 김 이사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동시에 그 만의 독특한 운용철학도 서서히 자리잡게 됐다. 쉬운 길이 아닌 또다른 가시밭길을 선택한 셈이다.
"기업들을 분석하다 보니 '두가지 원칙'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영업이익의 양과 질을 따져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사람들의 관심이 없는 종목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는 점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요즘 광고 문구 중에 'See the unseen.(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라는 말 있죠? 그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네요."
매출액이나 이익이 늘고 있는 지 여부 등 기업의 외형도 중요하지만 그 속내용도 꼼꼼히 살피라는 것. 그는 심지어 경영진의 경영전략이나 직원에 대한 대우 등까지도 주요 사항으로 점검한다. 회사가 미래를 위해 어떤 투자를 하는 지, 임직원이 어떤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 잠재력을 파악하는 기준은 절대 비밀이란다.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숨겨진 성장주에 투자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구체적인 종목은 얘기할수 없습니다. 시장 상황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조정합니다. 기업에 대한 투자여부를 결정할 때에는 기업의 핵심내용을 최대한 '단순화'한 뒤 판단합니다."
김 이사는 기업내용을 단순화하기 위해 1장 짜리 리포트에 기업의 경영현황, 경영전략, 전망 등을 담아서 정리해놓는다. 핵심사항을 정리한 요약 리포트를 자신만의 판단지표로 삼는다.
"펀드매니저를 하다보면 주위에는 정말 수많은 정보와 얘기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너무 많이 접하면 오히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저는 한가롭게 다른 사람의 여러 생각들을 종합하지 않습니다. 그럴 시간에 이 회사의 1년 뒤, 3년뒤의 모습을 전망하고 핵심 경쟁력을 따져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오랫동안 숙고(熟考)하는 편입니다."
◆연예인 길거리 캐스팅하듯…"똘똘한 2등을 골라라"
김 이사가 종목을 고를 때 주위에 꼭 강조하는 말이 있다. '주식시장은 미인(美人)대회가 아니다'라는 것. 내가 보기에 미인은 남들이 보기에도 미인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미인들을 골라담다 보면 결국 남들과 같은 수익을 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초과수익을 거둘수 있는, 이른바 전략종목을 고를 때에는 '미인대회의 심사위원'이 되기보다는 '연예기획사의 캐스팅 담당자'가 되라고 그는 강조한다. 처음부터 캐스팅할 수 있는 눈을 가지기 어렵다면 '똘똘한 2등'에 투자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김 이사는 덧붙였다.
이같은 방법으로 주식을 운용한 결과 교보투신운용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수익률 면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까지 더해지면서 공모펀드보다는 사모펀드, 개인자금보다 법인자금과 연기금을 주로 맡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도 냈다. 2007년 8월. 김 이사는 12년간 일했던 교보를 그만두고 알리안츠GI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엔 주식운용본부에서 연금운용팀장을 맡았다.
김 이사가 이끄는 연금운용팀은 국민연금이 각 운용사에 위탁하는 자금을 꾸준히 끌어모았다. 알리안츠GI는 2007년 국민연금으로부터 사회책임투자형 자금을 위탁 받았고 올해도 이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그만큼 운용성과 등 모든 부문에서 국민연금의 신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위탁 자산운용사를 교체하거나 자산배분 차원에서 주식형 펀드에 위탁하는 자금의 비중을 줄였다. 그렇지만 알리안츠GI가 맡고 있는 위탁운용 규모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올해에도 일부 운용사들의 자금이 회수됐지만 알리안츠GI는 오히려 장기투자형 운용사로 새로 선정됐다.
국내 주식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으로부터 이처럼 신뢰를 받고 있는 비결이 뭔지, 해당펀드의 투자처와 수익률이 궁금했다. 어디에 투자했는지 구체적인 수익률이 어떤 지 몇번이고 질문했지만 대답은 '노코멘트'였다.
"국민연금의 위탁 자산운용사는 포트폴리오를 공개해서는 안됩니다. 수익률도 마찬가집니다. 최근 몇년간 대형사를 제외하고는 알리안츠GI가 꾸준히 선정되고 위탁받고 있어요. 이 점을 잘한다는 증거로 삼아주세요."
곤란해 하는 김 이사에게 더 이상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주변 취재를 통해 김 이사가 운용하는 주식형펀드가 지난해 국민연금 내 주식형 펀드에서 월등한 성과를 거뒀고, 이로인해 올해도 위탁 운용을 계속 하고 있다는 점 정도를 알 수 있었다.
한국법인인 알리안츠GI는 전직원 46명 중 17명(약 37%)이 여성이다. 여성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한국 뿐만 아니다. 알리안츠GI는 세계적으로 성별과 인종의 다양성과 다문화를 추구하고 있다. 타이완 법인의 경우 최고경영자(CEO)인 리타 후(Rita Hou), 최고마케팅책임자(CMO) 비비안 투안(Vivian Tuan) 역시 여성이다.그렇다면 국내 여성 주식운용본부장 1호로서 그가 보는 현재의 주식시장 전망은 어떨까?
"지금은 여러가지 가능성이 엇갈리는 시기입니다. 그래도 상승여력은 20~30%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다음 상승장이 올 때 치고 올라갈 종목들을 살펴봐야겠죠. 그런 회사는 지금 연구·개발(R&D) 비율이 높은 회사입니다. 올해까지 투자를 통해 준비한 기업들은 2010년에 이익이 급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기업은 업종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있습니다. 저는 정보기술(IT)이나 자동차 관련 업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후배들이여, 나를 넘어서라"
펀드운용과 시장에 얘기하다보니 문득 개인사가 궁금해졌다. '일이 애인이냐'는 질문에 싱글인 김 이사는 손사래를 쳤다. 연애도 결혼도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는게 문제다. 이제는 운용 뿐만 아니라 관리업무까지 하게 됐으니 없는 시간도 쪼개야 할 판이다.
"독신주의는 아니예요. 저도 애인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우같은 사람과 곰같은 사람으로 분류하다면 전 곰과가 더 좋아요. 이상형을 든다면 외모는 영화배우 정우성쯤으로 해둘까요?"
유쾌한 웃음 뒤에 그는 후배들을 향한 대담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김 이사는 후배들에게 공존이나 공생을 하자는 동료애 보다는, 자신을 밟고(?) 일어서라는 조언했다.
"후배들에게 저를 넘어서고 올라서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성 최초'를 위해서 일하지 않았는데, 이 타이틀을 달게 됐고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동시에 '왜 내가 처음이 됐을까?'라고 자문도 하게 되더군요. 후배들이 실력을 키우면서 포기하지 않고 커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펀드매니저든 본부장이든 여성인 게 더이상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로요."
그는 투자자들에게 당부도 잊지 않았다. "투자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하세요. 남의 권유나 추천에 의해서 혹은 무조건 추종하는 방식의 투자는 지양해야 합니다."김 이사는 더 이상 여성 1호라는 게 뉴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널찍한 본부장 자리를 놔두고 입사 이후 지켰던 자리에 앉았다. 언제 인터뷰를 했냐는 듯 주식운용본부장으로서 펀드매니저들을 다스리는 그는 매우 다부진 모습이었다. 시장을 살피고 다른 매니저들과 수시로 소통했다. 허례허식을 마다하는 그의 모습은 '최초' 보다 '최고'라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글= 한경닷컴 김하나 기자 hana@
사진= 한경닷컴 양지웅 기자 yangd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