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재포럼 2009] (9) 이틀은 학교·사흘은 직업훈련…15살의 고민은 '진학' 아닌 '진로'

● '匠人'을 키우는 스위스
학생 60%가 직업학교 진학… 결정 후회되면 언제든 '다른 길'
1학년때 1mm 부품 25개 단순 조립… 3학년때 200개 넘는 정교한 시계
체계적인 실무교육이 롤렉스·오메가 같은 명품 만들어
"직접 일을 해 보니까 '아름다운 직업'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마티아스 예커 · 15)

지난 6일 스위스 서부의 작은 소도시 그레첸.이곳엔 스와치그룹의 일원인 시계부품 생산업체 ETA의 실습전용 공장 건물이 있다. 100년이 훨씬 넘은 듯한 건물 외관.1790년대 세워진 이 회사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부에 들어서자 눈에 돋보기를 대고 1㎜도 안되는 시계 부속품 25개를 붙들고 씨름하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교사 루돌프 마티씨(33)는 "1학년 학생들이 제일 간단한 시계를 만들어 보고 있다"며 "졸업하는 3학년이 되면 부속품이 200개 정도 들어가는 정교한 시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층에서는 부속품을 만드는 금형기기에 대한 교육이 실시됐다. 예커군은 설계도에 따라 알루미늄으로 금형을 만들었다. 그는 "공장에서 20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데,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직업학교를 다닐지를 선택하기 위해 사흘간 실제 시계 생산 작업을 경험해 보러 나왔다"고 말했다. 교육받은 지 이틀밖에 안됐지만 예커군이 만든 금형틀은 생각보다 정교했다. 마티씨는 "예커군처럼 중학교 때 직업활동을 경험해 본 학생들 상당수가 직업 학교를 택한다"며 "ETA에서는 주변 직업학교들과 연계해 연간 180명 정도의 견습생(apprentice)을 3년간 교육하고 있다"고 했다.


◆스위스 시계산업 일등공신은 직업교육

장인정신이 깃든 명품으로 인정받는 스위스 시계산업은 직업교육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피에르 알랭 뷔에이으 ETA 마케팅 담당자는 "시계산업은 직업교육을 통해 장인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학생들은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탄탄한 직업교육 체제의 혜택을 보는 것은 시계산업뿐만이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스위스 중소기업들은 모두 직업교육을 통해 신입사원을 뽑는다.

봅스트그룹의 직업교육 책임자 프랑크 르 발로와씨는 "연간 260명 정도에게 직업교육을 제공하고 이 중 60% 정도가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나머지 40%는 응용과학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하거나 다른 기업으로 간다. 그는 "견습생 1인당 교육비가 연간 2만스위스프랑(2300만원)가량 들지만 젊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어 정부 · 기업 · 학생들이 모두 혜택을 본다"고 설명했다. 발로와씨는 "봅스트그룹 제품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를 받는 것은 좋은 인재를 확보하고 교육하는 시스템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봅스트그룹의 르넨지역 공장에서 전기기술자 교육을 받고 있는 제레미 에르망자르군(20)은 "일하는 것이 재미있고 좋아서 이 회사에 입사하기로 결심했다"며 자랑스럽게 자신의 제작품을 보여줬다. 서로 다른 기계 간의 신호 체계를 조작해 자동으로 물건을 조립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지점에서 나사못이 박히고 트레일러가 움직였다. 기계설비 기술을 배우고 있는 스테판 색스군(20)은 "학교와 달리 기업에서는 최신식 교육용 장비와 원자재를 쓸 수 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중소기업 경쟁력 밑거름

스위스에서는 전체 학생의 60%가량이 15~16세에 직업학교로 진학한다. 우리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해당하는 9년제 의무교육을 마친 후 학생들은 '선택학교(selective schools)'로 불리는 대학 진학을 위한 고교와 직업학교 중 하나를 선택한다. 직업학교는 다시 정식 학위(디플로마)를 받을 수 있는 3~4년제와 인증서만 받을 수 있는 2년제로 나뉜다. 만약 학생이 결정에 후회한다면 언제든 다른 길로 옮겨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직업학교 졸업 후에도 원할 경우 대학입학능력시험인 '연방 직업교육 바칼로레아트'를 거쳐 응용과학 대학 등에 진학할 수 있다.

직업학교에 간 학생들은 학교보다 기업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실습 대상 기업과 업무는 학생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결정된다. 월~금요일 중 3~4일은 기업에서 직업교육을,1~2일은 학교에서 언어 · 수학 · 전기공학 등 이론교육을 하는데 3+2 체제의 비율이 높다. 졸업학년에는 각 기업에 수주간 인턴으로 배치,'실전'을 경험한다. 견습생이지만 기업마다 철저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졸업할 무렵에는 해당 분야의 당당한 전문가가 된다. 기업은 학생들의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을 댈 뿐만 아니라 연차에 따라 일정한 봉급도 준다. 유럽에서도 스위스의 직업교육 시스템은 특히 기업에서의 실전 경험에 많은 비중을 두는 축에 든다. 그렇다고 기업에만 모든 것을 맡겨 놓는 것은 아니다. 스위스 연방정부 직업교육기술 관리기관(OPET)의 아드리안 뷔스트씨는 "연방정부와 26개 주정부,산업별 협회 등이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학생들이 어느 학교,어느 기업에 가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전했다.

뷔스트씨는 "스위스에서는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이나 직업교육을 받는다는 식의 편견은 없다"고 단언했다. 한국처럼 무조건 대기업이나 공기업을 선호하는 분위기도 찾아보기 어렵다. "좋은 직업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일에 애착을 갖고 열정을 쏟는다"며 "더 나은 공정,더 나은 제품,더 나은 디자인에 대한 아이디어도 거침없이 제안한다"고 그는 말했다. 생산직이 '2류 직업'으로 여겨지는 한국과는 딴판이었다.

베른 · 그레첸 · 르넨(스위스)=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