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재주는 제록스가 부리고 돈은 MS가 벌고…

'오픈 이노베이션' 시대
"2020년까지 지금의 4배인 4000억달러의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는 외부 역량과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30일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향후 10년의 중점 과제 중 하나로 '열린 혁신(open innovation)'을 꼽았다. 다른 기업이나 외부 연구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신제품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조달하겠다는 의미였다. 지난 4일에는 신기술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들이 계열사 협력업체가 될 수 있도록 문호를 적극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뼈대로 한 '신(新)상생협력' 방침을 공개,'열린 혁신'이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외부에 알렸다. 내부 연구개발(R&D)을 통해 세계 전자업계를 장악한 '기술기업' 삼성전자가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려 하는 이유는 뭘까.



◆재주는 곰이 넘고…PC 화면에 떠 있는 그림을 클릭하면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는 애플이 매킨토시 컴퓨터를 통해 처음 선보였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시리즈에 적용돼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기술의 원조는 복사기 회사인 제록스다. MS워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브라보 워드프로세서'와 관련된 기술도 제록스의 팔로알토연구소(PARC)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애플과 MS는 제록스 출신 연구원을 스카우트하는 방법으로 GUI와 워드프로세서 관련 기술의 상당 부분을 손에 넣었고 이를 발빠르게 상품으로 만들었다. 의사결정이 느린 제록스는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은 기술을 먼저 개발한 기업이 후발업체에 시장을 내주는 사례가 앞으로 더 빈번해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시장성은 있지만 자금사정 등을 이유로 차순위로 미뤄뒀던 기술을 기업 내에 묶어두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이유에서다. 탁월한 아이디어에 창업 비용을 대주는 벤처캐피털의 발달,유능한 R&D 인력의 잦은 이동 등이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내부 R&D 성과물 100개 중 경쟁업체보다 한발 앞서 상품화되는 것은 1개에 불과하다"며 "99개의 기술은 결국 기업 외부로 서서히 빠져나간다"고 설명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핵심은 뛰어난 칩을 만드는 것이지,훌륭한 논문을 출판하는 것이 아니다. "(파올로 가르기니 인텔 기술담당 이사) CPU 시장의 절대강자인 인텔은 1968년 창업 이후 공식적인 연구소를 두지 않고 기업을 운영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비대한 R&D 조직을 운영한다고 해서 필요한 신기술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R&D 조직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의도도 숨어 있다.

인텔은 공식적인 R&D 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업계를 이끄는 기술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이 회사의 주된 기술 공급 창구는 외부 연구 프로그램이다. 인텔은 300여개 외부 연구 프로젝트에 매년 수억달러의 예산을 지원,필요한 기술을 얻는다. 연구 기관과 인텔 사이의 의사소통은 해당 기관에 본사 직원을 파견하는 방법으로 해결한다. MS는 매년 10억달러 이상을 협력업체 기술 지원에 사용한다. 기술을 얻을 수 있는 핵심적인 루트가 협력업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회사의 대표 상품인 PC 운영체제(OS) 윈도의 플랫폼 작업에는 600만명에 달하는 협력업체 직원이 참여했다.

업계 관계자는 "유기적으로 잘 조직된 외부 연구조직은 기업 내 연구조직 이상의 효과를 낸다"며 "비용 대비 효율이 높고 내부 조직에서 생각하기 어려운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는 것도 외부 R&D의 장점으로 꼽힌다"고 설명했다.

◆R&D 성과는 사고팔 수 있는 상품

IBM은 지난 2001년 지식재산의 특허권 사용료로 19억달러를 벌어들였다. 같은 해 이 회사가 R&D에 투입한 액수 6억달러의 3배가 넘는다. 당장 사업화가 곤란한 기업 내부의 R&D 성과를 상품화해 판매한 사례다.

'닫힌 혁신'의 세계에서 R&D 성과는 어떤 경우에도 외부에 유출하지 말아야 할 기업의 비밀이다. '열린 혁신'으로 기조를 바꾸면 상황이 반대가 된다. 지식재산을 구매한 경쟁 업체가 사업에 성공하면 특허 수익도 늘어나 기업에 도움이 된다.

일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새로운 앨범을 만들기 위해 과학자들과 손을 잡았다.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북극 탐험에 함께 참여해 북극곰과 고래,바다표범 등 극지방에서 서식하는 동물들의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사카모토씨는 동물들의 소리와 악기 연주를 결합해 새롭고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전문가들은 사카모토씨의 사례를 기업 R&D 조직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지식을 '제조'하는 것에서 한발 나아가 외부와 내부의 지식을 '결합'할 수 있어야 시너지 효과가 커진다는 것이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