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세종시 누구의 뜻을 따라야 하겠는가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진(秦)나라의 승상 조고(趙高)가 자기를 따르지 않는 신하를 골라내기 위해 벌인 고사(故事)로 잘 알려져 있다. 진시황의 조서를 위조해 2세 황제를 세우고 환관 출신으로 최고 권력자가 된 조고는 어느 날 황제에게 사슴(鹿)을 바치며 "말(馬)을 바치니 거두어 달라"고 말한다. 황제가 "승상은 농담도 잘한다"고 하자 조고는 신하들을 바라보며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냐"고 묻는다. 대부분 "그렇다"고 했으며 소수 "아니다"고 말한 신하들은 다 잡아 죽였다는 사건이다.

이 지록위마처럼 오늘날 한나라당의 양태를 잘 묘사하는 말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어렵게 시작된 세종시 수정논의가 무르익을 무렵 박근혜 의원이 "세종시 원안 고수"를 천명한다. 그러자 친박 국회의원들이 일제히 "수정 반대"를 외친다. 어느 날 보스의 마음이 바뀌면 그들은 우르르 모두 찬성으로 돌아설 것은 아마 장담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을 소신도 영혼도 애국심도 없는 국회의원이라고 매도할 수는 있으나 최소한 영남의 유권자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이 사람들은 진나라의 신하들처럼 국민과 소속정당보다는 막강하게 지역표심을 장악한 보스에게 충성해야 목숨보다 귀한 국회의원 직을 누릴 수 있다. 문제는 세종시 같은 국가 중대사의 운명이 이들에게 달린 것. 보다시피 이들은 세종시가 사슴이 되건 말이 되건 보스의 입만 쳐다 볼 뿐이라는 것이다.

최근 세종시 문제가 공론화함으로써 당시 노무현 정권과 한나라당의 처신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노 정권은 수도이전이 위헌 판정나자 그러면'행정도시'를 짓겠다며 당초 계획한 수도보다 더 크고 말레이시아의 푸트라자야같이 폼 나는'수도형 행정도시'건설을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은 행정부의 지방 이전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노상 강조한 분이지만 수도이전의 미련이 더 커서 대못을 박았다. 한나라당은 행정도시가 "국가에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자기들끼리 파벌 싸움한 결과 "나중에 되돌리자"며 합의해 주었다. 이렇게 여야가 모두 국가에 해독이 됨을 잘 알면서 국민을 속이고 야합해 탄생한 것이 세종시다. 이'허위의 도시'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것처럼 자신도 남도 속이는 것이다.

오늘날 세종시 수정은 오직 '절차와 명분론' 때문에 가로막혀 있다. 국회에서 통과된 합법적 사업을 민주주의 정치는 수정할 수 없고,국민과 한 약속을 깨면 정치적 신뢰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도시 법안 통과 자체가 바로 우리 대의민주주의 정치가 실패한 최대의 역사적 증거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이 국가에 해독이 되는 일을 고의로 저지르라고 국회의원을 뽑았겠는가. 이렇게 국민을 배신한 국회 결정을 지키는 것이 정치적 신뢰인가.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은 확보했으나 그 근본이 되는 도덕성과 신뢰성은 유지하겠는가. 한 나라의 대통령,국회,국회의원들이 이런 잘못된 결정을 수정할 아무 능력이 없다면 그런 국가기관은 민주주의 탈만 쓸 뿐 국민과 국가에 어떤 이익도 줄 수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만 무너뜨릴 것이다. 그런 정치를 일삼는 집단에 연연해서 표를 주는 국민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

만약 우리 정치가들의 고질병 때문에 국회가 세종시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국민의 의사를 직접 묻는 절차를 촉구해야 한다. 지난번 헌법재판소는 "수도 이전은 헌법 개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지금 짓는 행정복합도시는 실질적으로 '신수도'설계를 판 박은 것이고,'반쪽 수도'의 부작용은 수도 이전보다 더 크게 걱정되는 문제다. 그렇다면'수도 분할' 역시 국민투표로 결정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는 것이다.

김영봉 < 중앙대 명예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