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탐구 - 김태만 포항 스틸러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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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선수는 싸우는 전사이자 무대위의 배우"'너의 우승을 모든 선수와 팬들이 기다리고 있다. '
노무관리 30년 인사통, K리그 마케팅 새판 짜다
프로축구팀 포항 스틸러스의 수비수 김형일(25)은 지난 7일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09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앞서 문자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김태만 포항 스틸러스 사장(55)이 직접 보낸 응원문구였다. 결승 나흘 전 부친상을 당한 김형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뛰겠다"는 생각으로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결승골을 뽑아 스틸러스가 우승하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김 사장은 올해 프로축구 K리그 판도를 뿌리째 흔들었다. 종전까지 모든 경기의 무게 중심은 '승리'였지만 그는 시선을 '관중'으로 돌렸다. 경기의 패러다임을 '엔터테인먼트'로 바꾼 것.선수들은 경기장의 '전사'가 아니라 무대에 올라가는 '배우'로 변신했다. 스스로 즐기면서 하는 축구는 선수단 전력을 최고조로 이끌었다. 스틸러스는 AFC챔피언스리그와 K리그 컵대회(피스컵코리아) 우승을 잇따라 차지하며 아시아 최고 구단의 반열에 올랐다. 이준하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은 "김 사장은 축구단을 경영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며 "K리그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관중 위주의 경기방식을 나머지 구단에도 적극 권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사와 노무에서 터득한 '퍼스널 터치'
김 사장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대학(청주대 행정학과)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바다 수영을 즐기고 볼링도 180까지 치는 등 만능 스포츠맨이다. 충남 서천 52사단에서 학군장교(ROTC)로 근무할 때 선수 겸 감독으로 사단장배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축구와의 인연도 깊다. 전역 후 1978년 포스코에 입사한 그는 인사와 노무업무를 주로 했다. 재직 30년 동안 노사 문제가 한 번도 불거진 적 없다는 게 그의 자랑이다. 김 사장은 지난해 2월 스틸러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축구단 사장은 퇴임을 앞둔 임원이 거쳐가는 자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축구단을 운영해보겠다고 스스로 손을 들었다. 축구를 워낙 좋아했던 데다 축구전용구장을 20년 전 포항에 세운 박태준 명예회장의 축구 열정을 이어가겠다는 바람에서였다. 지난해 2학기부터는 동국대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체육 전공)을 밟고 있다.
김 사장은 쉽게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다. 하지만 회식자리에서는 본인이 먼저 망가져(?) 분위기를 띄울 정도로 조직 분위기를 중시한다. 직원들은 물론 사무실 청소 아줌마,협력회사 직원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스타일로 통한다. 한 번 본 직원을 다시 만날 때는 꼭 이름을 불러주고,밖에서 식사하다 후배들을 보면 슬며시 계산하고 나간다.
김 사장이 포스코 인사실장으로 근무할 때 한 직원이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회사를 찾은 적이 있었다. 김 사장은 아이에게 이름과 학년을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야 고놈,아빠 닮아서 똑똑하게 생겼네.아빠 회사 구경하러 왔구나. 아빠가 다니는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회사고 세상에 꼭 필요한 철을 만드는 회사야…."#변화의 출발점-'스틸러스 웨이'
그는 사장 취임 후 프로축구를 외면하는 팬들을 운동장으로 불러올 수 있는 방법 찾기에 골몰했다. 포스코전략연구소의 도움을 받은 결과 '국내 축구의 최대 경쟁자는 박지성'이라는 답을 얻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에 쏠려 있는 팬들의 관심을 K리그로 끌어와야 한다는 얘기였다. 주말 K리그 결승전이 이른 새벽에 열리는 프리미어리그 경기 시청률보다 낮았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프리미어리그는 속사포 같은 플레이를 하는 데 반해 K리그는 선수들이 툭하면 드러눕고 항의하는 등 흥미를 앗아가는 요인이 수두룩했다.
김 사장은 올해 초 '포항 스틸러스가 가야 할 길'이라는 의미의 '스틸러스 웨이'를 도입,경기운영 방식에 메스를 댔다. 파울 항의를 줄이는 대신 실제 경기시간을 5분 이상 늘렸고,깨끗한 경기 매너를 지키도록 독려했으며,심판의 권위를 존중하고 판정을 수용하도록 했다. 생산자 중심의 사고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180도 전환한 일종의 '관중 감동 프로젝트'였다. 선수단 내부 평가시스템도 대폭 손질했다. 골과 승리 대신 매너와 박진감으로 선수들을 평가하기로 한 것.'스틸러스 웨이'는 도입 초기 성적 부진이라는 암초에 걸렸다. K리그 개막전에서 승리한 뒤 무려 9경기 연속 무승(7무2패)이라는 부진에 빠지며 10위까지 추락했다. 당연히 선수들 사이에 반기류가 흘렀다. 김 사장은 '괜한 짓을 한 게 아닌가'라는 고민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스틸러스 웨이'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판단이 섰다. 김 사장은 침체된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지난 6월 충남 아산 현충사를 찾았다. 충무공의 살신성인과 임전무퇴정신을 선수단과 함께 나누며 "다시 시작하자"고 독려했다. 스틸러스는 그 후 18경기에서 13승4무1패를 거두는 대반전(大反轉)을 이뤄냈다.
#가족은 또 다른 선수
김 사장은 입버릇처럼 "가족은 또 다른 선수"라고 말한다. 뛰어난 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의 노력 못지 않게 가족의 역할이 크다는 얘기다.
그는 어버이날 선수 부모들에게 꽃을 보낸다. '훌륭한 선수를 키워 포항 스틸러스에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편지와 함께.지난 9월 제주 원정을 마친 뒤에는 싱싱한 해산물세트를 선수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보냈다.
초청 행사도 잦다. 선수 가족을 초대,합숙소에서 같이 자고 식사도 하면서 구단과 일체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AFC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두고도 도쿄로 선수 가족을 초청했다. 가족들의 해외 동행 관람은 프로축구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변에선 결승전이라는 큰 무대라는 점을 내세워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선수와 가족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마련할 때 선수들도 더 힘을 낼 수 있다는 것.
그럼 실제 가정은 어떨까.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두 딸에게 아빠의 성적표는 '낙제점'이란다. 그는 "일밖에 몰라서인지 아빠로서의 평가는 빵(0)점"이라고 자평했다.
#선수도,시민도 '우리는 하나'
스틸러스에는 선수와 구단의 불화를 찾아볼 수 없다. 권위의식을 버리고 선수에게 다가서려는 사장의 마음이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김 사장은 지난해 4월 깜짝 변신을 시도했다. 휑하게 뚫려있던 머리에 모근을 심은 것.마음은 젊은데 외모가 늙어 보여서 선수들이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스틸러스에는 변변한 스타가 없다. 하지만 개인기보다 조직력을 앞세워 K리그 최강팀으로 우뚝 섰다. 선수 전원이 '스틸러스'라는 별을 더욱 반짝거리게 하기 위해 더욱 더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다.
김 사장은 포항시민 52만여명과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축구단을 만들고 싶어 한다. 스틸러스가 시민의 팀으로 더욱 사랑받고 포항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각오다. 팬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선수 경호원 수를 줄이고,전용버스가 향하는 길에 놓는 바리케이드도 제거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선수들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부터 합숙생활을 하면서 몸에 밴 '재미 없는 축구'를 하루 아침에 떨쳐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공격적인 축구,신사다운 축구'라는 청사진은 명확하다. 김 사장의 휴대폰에는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나는 행복한 사람 · 이문세)가 흘러나온다. 노래 속의 '그대'는 아무래도 스틸러스이지 않을까 싶다.
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