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튼튼한 뿌리

심윤수
지난달 상공회의소 조찬에 참석해 후카가와 유키코 일본 와세다대 교수의 '세계 경제위기 이후 동아시아 경제구도 재편과 한국의 대응'이란 주제의 강연을 들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금융 중개 기능이 붕괴되는 등 세계 경제의 구조가 변화하고,일본을 선두로 부가가치가 낮은 순서로 점점 저개발국으로 산업이 이전하는 '안행형(기러기 날개 모양) 성장'을 유지해왔던 동아시아 경제모델이 종식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속도와 일본의 치밀함을 융합,새로운 신지역주의 가능성에 적극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강의를 통해서 그는 일본도 한국도 동아시아 경제의 새로운 모델에 적응하지 못하고 안행형식 발상을 계속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의 경우 대일(對日) 적자 시정을 주장하는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표현했다. 국내외 직접투자가 일체화하고 글로벌 금융이 이루어지며,서비스와 인력을 아웃소싱하는 글로벌 시장 체제 아래에서 국가 간의 수지만을 조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대일 무역역조가 무엇인가. 지난해 대일 무역적자는 327억달러에 이르는 등 지속적으로 증가만 해오던 난공불락의 성이 아니었던가. 전체 대일 역조 중 부품소재의 비중만 올 10월까지 기준으로 72.3%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부품소재의 경쟁력 부족이 대일 역조의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부품소재의 경쟁력을 높이지 않는다면 대일 역조 개선도,선진국 경제로의 진입도 어려운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또한 대일 역조 개선 문제는 결코 무역수지 불균형 해소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구조를 건실한 부품소재 중심으로 개선하는 문제이며,국가경쟁력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대일 역조 개선을 위해 수출 증대와 부품소재 국산화 등의 노력을 꾸준히 병행해왔다. 그러나 고부가가치 부품소재 분야에서의 한 · 일 간 격차가 여전하며,한 · 중 간 범용 분야의 격차는 오히려 좁혀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다시 이 문제를 철저히 봐야 하는 이유다.

최근 발표된 정부의 '부품소재 경쟁력 제고 종합대책'은 2018년까지 '세계 4대 부품소재 강국'으로 진입하려는 정부의 청사진으로 남다른 기대를 갖게 한다. 이번 대책이 대일 역조 개선은 물론 선진국 진입을 위해 다시 한번 산업이란 나무의 뿌리를 더욱 깊고 튼튼하게 심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일 의존도가 높은 기계류나 전자부품은 국산화에,전통적 소재산업인 철강산업 등 모든 소재산업은 첨단소재 개발이란 정공법으로 이제 화답해야 하겠다. 유키코 교수가 말한 뜻을 이해는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대일 역조 개선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님이 하루빨리 증명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