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에 돈 '흥청망청'…그리스의 '예고된 비극'

신용등급 유로존 최저 추락…빚더미에도 공무원 5만명 늘려
과도한 연금에 노조파업까지
'휴브리스(자기과신 · 오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 대한 '네메시스(신의 복수)'라는 그리스 비극의 고전적인 테마가 현실에서 재연됐다. 경제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방만하게 공공 부문 지출을 늘리다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의 국가신용등급이 전격적으로 하향 조정된 것이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8일 그리스의 국가신용등급을 기존의 'A-'에서 'BBB+'로 한 단계 낮췄다. 그리스 신용등급이 A등급 이하로 떨어진 것은 10년 만에 처음이다. 이번 조치로 그리스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중 신용등급이 가장 낮은 국가로 추락했다. 피치는 신용등급 전망도 '부정적'으로 낮춰 추가 강등 가능성도 열어놨다. 피치는 "최근 그리스의 사회 혼란과 재정 건전성 악화 등을 고려해 국가신용등급을 지난달 한 단계 떨어뜨린 데 이어 또다시 하향 조정했다"고 밝혔다. 피치에 앞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그리스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 관찰대상'으로 낮췄다.
신용등급 하향 영향으로 그리스 증시는 이날 6.1% 급락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각국 증시도 동반 하락했다. 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는 "그리스의 국가부도 우려로 각국 증시가 무너졌다"고 전했다. 그리스 국채 가격은 최근 7개월래 최저(금리는 최고)로 추락했다. 게오르기에 파파콘스탄티누 그리스 재무장관은 "기록적인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각국의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그리스는 올해 재정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12.7%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엔 5.5%였다. 또 국가 총부채는 올해 GDP 대비 112.6%,내년에는 124.9%,2011년에는 135.4%까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EU 회원국의 재정적자(GDP 대비 3% 이내) 및 국가부채(GDP 대비 60% 이내) 기준보다 각각 4배,2배 이상 많은 것이다.

그리스가 이처럼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빚에 허덕이는 것은 2001년 유로존에 가입한 이래 공공 부문에 흥청망청 정부 돈을 써왔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부는 2004년부터 2009년까지 공무원을 5만명이나 늘렸고 그나마 공공 부문 과잉인력에 대한 감독도 소홀히 했다. FT는 "그리스 공무원들은 업무시간 중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하거나 쇼핑을 해도 별다른 제재가 없다"며 "심지어 가족이 아파 장기간 간호휴가를 내도 업무를 대행할 인력이 수두룩한 만큼 부담조차 느끼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같은 상황에도 그리스 공무원들은 내년 임금이 5~7%가량 인상될 예정이다.

여기에 과도한 연금제도도 정부의 채무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리스 정부는 13개나 되는 국가연금을 3개로 줄이고 여성 정년을 65세로 늘리는 개혁안을 마련했지만 노조의 반발이 거세다. 그나마 그리스의 재정적자 실상은 지난 10월 사회당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진 철저하게 은폐됐다. 그리스는 글로벌 경제 호황기에는 연평균 4%가량 고성장을 구가하며 재정적자 부담을 해소해왔지만 경제위기 이후 단위당 노동비용이 40%가량 급증하며 경쟁력을 급속히 상실하고 있다.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총에 15세 소년이 사망한 사건 1주년을 맞아 그리스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정치적 혼란마저 가중되고 있다. 비즈니스위크는 "유로화의 약한 고리인 그리스라는 시한폭탄이 터질 경우 유럽 전체로 위기가 번질 수 있고 유로화의 위상에도 타격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곽병열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그리스에 대한 해외 은행 대출 중 프랑스(26%) 스위스(21%) 독일(13%) 등 유럽계 은행이 83%를 차지해 유럽 금융사에 직간접적인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에 대해 호아킨 알무니아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 경제통화 담당 집행위원은 "EU는 그리스 정부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인 조치와 개혁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을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