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밥 먹었던 노숙자가 봉사자로 찾아올때 뿌듯"

21년째 서울역 노숙자 돌보는 김범곤 목사
지난 10일 오후 6시50분 서울역 인근 역전우체국 앞 지하보도.500~600명쯤 돼 보이는 노숙인들이 지하보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저녁 밥을 먹으러 온 사람들이다. 간단한 예배가 끝나고 배식이 시작되자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밥과 반찬,국을 퍼 준다. 그 중의 한 사람,국을 떠주는 손놀림이 유난히 익숙한 이가 있다. 올해로 21년째 서울역 일대에서 노숙인과 가난한 이들에게 밥을 해주고 있는 김범곤 목사(59 · 예수사랑선교회 대표)다.

김 목사는 서울역 일대 노숙인들의 대부요 '왕초'이며 가족이고 친구다. 그래서 그가 노숙인을 '노숙형제''노숙자''거지새끼'라고 불러도 뭐라는 사람이 없다. 때로는 호통을 치고 나무라도 그 앞에선 순한 양이 된다. 1989년 서울역 지하도에서 약을 팔던 중국동포들에게 자장면을 대접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오직 한길,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을 위해 살아온 그의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김 목사를 배식이 끝난 뒤 서울역 뒤편의 '사랑의 등대'에서 만났다. 지난 4월 개원한 '사랑의 등대'는 660㎡(약 200평) 규모의 식당 겸 예배당과 5000명 분의 식사를 조리할 수 있는 취사장을 갖추고 있는 기독교긴급구호센터다. 예수사랑선교회는 하루 두 끼 1500~2000명 분의 밥을 제공한다. 화~토요일 아침과 수 · 일 저녁은 '사랑의 등대'에서,목 · 금 저녁은 지하도에서 예배를 드리고 배식한다.

▼노숙인들에게 그렇게 야단을 쳐도 괜찮습니까.

"야단칠 건 쳐야죠.무조건 다 받아준다고 사랑은 아니니까요. 지금은 비록 얻어먹고 살지만 인격과 도리까지 내던지고 살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식사 전 예배 때마다 '빨리 서울역 지하도를 졸업해서 새 사람이 되라'고 대놓고 말합니다. 제가 좀 깡패예요. "▼노숙인들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습니까.

"1989년 당시 중국 동포들이 약을 팔러 한국에 많이 왔어요. 그때 그들의 중국 내 월급이 한국돈 2만~3만원에 불과했는데 여기 와서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여인숙에서 하루 자고 나면 한 달 월급이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중국집에 데려가 자장면을 사 먹였죠.수중에 있는 대로 컵라면도 사주고 그러다 노숙형제들이 합류하면서 반반 정도 됐어요. 차츰 중국 동포는 사라지고 노숙형제들만 남게 됐죠."

▼식구가 불어나니까 힘들지 않던가요.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필요한 만큼 하나님께서 다 도와주니까 괜찮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 같아도 소리소문 없이 돕는 손길이 있고,세상이 썩었다고 해도 썩지 않고 좋은 사람이 더 많아서 나라가 유지되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한 번도 남들에게 도와달라고 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쌀이 떨어져 밥을 못한 적은 없어요. 노숙인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사람들이나 밥만큼은 양껏 줍니다. "

▼살림이 예측가능해야 하지 않나요.

"우리(예수사랑선교회)는 고정적인 후원자가 30명도 채 안 돼요. 그러니 살림이 항상 어렵고 힘들긴 하죠.지금도 '사랑의 등대'는 냉방에다 가스값과 건물 임대료가 밀려 있고 적잖은 빚도 있지만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부족하면 항상 누군가 채워주시거든요. 부잣집 살림은 며느리 손끝에서 나온다고,그날 형편에 따라 고깃국도 끓이고 시래기된장국도 끓이는 것이죠."▼그동안 고생도 많았겠어요.

"1991년 선교회 설립 이후에 참 많이도 옮겨 다녔어요. 처음 서울역에서 무료급식을 시작할 땐 '거지 소굴'을 만든다고 경찰의 방해가 심했고,부자들이 많이 사는 평창동에서 120명이 생활하는 쉼터를 운영할 땐 '귀족들 사는 곳에 거지새끼들이 왜 들어왔느냐'며 1000명이나 모여 시위를 하더군요. 그동안 서울역 주변의 후암동,양동,동자동 등 10번도 더 옮겨 다니다보니 닥치는 대로 일했죠."

'사랑의 등대'에는 20여명의 노숙자들이 생활한다. 예배당 겸 식당 뒤편에 취사장이 있고 2층에 노숙인들이 생활하는 방이 4개 있다. 김 목사 부부와 두 아들도 여기서 함께 산다. 기존 건물을 방으로 개조하면서 김 목사가 직접 2층짜리 침대와 옷장을 만들었다. 김 목사는 "하도 옮겨 다녀서 이젠 내가 목수요 미장이가 됐다"고 했다.

▼경제가 어려우니 더 힘들지 않나요.

"곳간에서 인심난다고,경제가 어려우니까 개인들이 주머니를 여는 데 힘이 들죠.특히 우리는 고정 후원자가 적어서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부문화가 많이 달라져서 좋아진 점도 많습니다. 특히 기업이나 단체들이 관심을 가져주니 더없이 고맙죠."

▼가까이서 접해본 노숙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흔히 노숙자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은 도둑질도 나쁜 일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추운 데서 술 없이는 견딜 수 없으니까 마시다보면 몸이 망가지고 정신도 피폐하게 되는 거죠.결국 복합적 원인으로 고장이 난 사람들이라 그에 맞게 치료를 해줘야 돼요. 머리 깎고 코 닦아 준다고 암환자가 낫지 않는 것처럼 노숙자들도 밥만 먹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거든요. 구체적인 내적 치유와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양주에 이들을 위한 훈련소(다시서기훈련원)를 만들어 술을 끊고 신앙공부도 하면서 사회복귀를 돕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

▼실제로 그런 훈련의 효과가 있습니까.

"지금 '사랑의 등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노숙자들이 새 사람 돼서 남을 위해 밥하고 배식을 합니다. 노숙자 출신 중에 개인사업하는 사람도 있고,총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전도사도 있습니다. 동해에서 큰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도 있고요. 새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중요해요. "

▼가족들도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좀 편하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까.


"사실 저는 이 일이 힘들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 생각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제가 미친 놈이죠.다만 가족들한테는 정말 미안하죠.지금까지 애들한테 용돈 한 번 줘 본 적 없고 집사람한테는 결혼 후 호강은커녕 고생만 시켰으니까요. 그래도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저 사람들도 반쯤은 미친 것 같아요. "

▼성탄 시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보고 닮아야 할까요.

"성탄절이라고 자칫 들떠서 즐기기만 한다면 '동방박사 놀음'을 하게 돼요.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찾아가다가 헤롯대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바람에 예수님은 딴 동네(애굽)로 피난가고 두 살 이하 또래들도 헤롯대왕이 다 죽였잖아요. 동방박사들이 선물한 황금과 유향,몰약보다 사람을 살리러 오신 예수님을 봐야 하는데 예수님은 딴 동네에 보내놓고 '내가 무엇을 했으니까'라는 실적놀이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을 살리는 것,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가라,하라'고 하시지 않고 '가자,하자'고 하셨거든요. "김 목사는 "예수님이 낮게 오신 것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며 "가난한 이웃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보고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김 목사가 가는 곳이 바로 교회요,공동체였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그가 말했다. "우리가 밥을 나눠 먹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곳,여기가 바로 교회입니다. "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