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우 前한일은행장 자서전 출간…"자신을 버린 CEO 있어 외환위기 극복"

금융인 삶·외환위기 극복 얘기 담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고 난 얼마 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단독면담을 했다. 구조조정 계획,보유지분의 담보제공을 요구한 뒤 마지막으로 경영권 포기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김 회장은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내가 말했다. 주거래은행장이 그룹 총수의 경영권을 포기시킬 수 있는 법적 권리가 없는데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 알겠느냐고.한참 생각하던 김 회장이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를 알겠으며 경영권 포기각서를 쓰겠다고 했다. "

이관우 전 한일은행장(73)이 자서전 '장미와 훈장'(형설라이프 출판)을 펴냈다. 1962년 한일은행에 입행한 뒤 1998년 8월5일 은행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7년간 금융인으로서의 삶과 고뇌,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의 피와 눈물을 담았다. 기자와 만난 이 전 행장은 김 회장 얘기부터 꺼냈다. "지금까지 김 회장을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결단이 빠르고,특출한 경험과 지식을 겸비한 최고경영자(CEO)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 외환위기 당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이 전 행장은 조 회장에게 회사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일하라고 권했다. 회장이 야전침대까지 갖다놓고 비상한 각오로 임하는 것을 보고 주주들이 바스프(BASF)를 매각하고 물산과 나일론을 합병하는 등의 구조조정에 찬성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 행장은 "위기 때 자신을 버린 기업인들과 이들을 적극 후원한 정부와 은행,국민이 있어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행장으로서 느낀 IMF 처방과 우리의 대처에 대해서도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부채비율은 높았지만 견실하고 경쟁력있는 기업들 다수가 도산하거나 헐값으로 외국에 매각됐는데 고금리정책과 긴축재정을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기업 중 상당수는 회생했을 것이다. IMF의 권고사항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점,천문학적 공적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샴페인을 터뜨린 일,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미봉한 일 등은 더 연구해야 봐야 한다. "그는 자서전 제목 '장미와 훈장'에 대해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도 소중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피는 장미 한 송이의 가치를 능가하기 힘들다"는 말로 자신의 회한을 담았음을 내비쳤다. 이 전 행장은 1997년 국민훈장 모란장과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은행 부실에 대한 책임문제로 소송을 당했다. 2007년 4월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