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 CEO 송년 좌담] 경쟁자는 밖에 있는데…우리끼리 싸우다 자멸했던 역사 끝내야

전투적 노조…경직된 고용…
젊은 인재 주류기업 못들어가
대기업 인력 노화현상 부작용
우리 기업들은 롤러코스터와 같은 한 해를 보냈다. 연초만 해도 1997년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비상 상황의 연속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물량 주문이 뚝 끊겼다. 생산라인도 절반이 멈춰섰다. 하반기 상황은 정반대였다. 주요 수출 대기업들은 잇따라 사상 최고 실적을 경신했다. 위기를 시장 개척의 기회로 활용한 공격적인 경영과 환율효과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경인년(庚寅年) 새해는 기회와 위기의 분기점이다. 올 하반기의 좋은 분위기가 내년까지 이어질 수도 있고,해외 경쟁업체들에 주도권을 빼앗길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한국경제신문은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이석채 KT 회장,정준양 포스코 회장,김반석 LG화학 부회장 등 업종별 대표 CEO(최고경영자)를 초청,송년좌담회를 갖고 내년을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사회=김영규 편집국장

◆사회=걱정하면서 올 한해를 시작했는데 끝나고 보니 오히려 자신감을 많이 얻은 해였던 것 같습니다. 위기 극복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정준양 포스코 회장=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생긴 '면역력'이 효자노릇을 했습니다. 경영진과 직원들 사이에 '위기'라는 공감대가 쉽게 형성됐습니다. 정부의 신속한 대응과 기업들의 도전정신,창조정신도 한몫을 했습니다. 포스코는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하는 '궁즉통(窮則通) 프로젝트'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올해 1조3000억원에 달하는 원가를 줄였는데 이 중 6000여억원을 '궁즉통'으로 해결했습니다. 철강 분야에서는 중국 특수(特需)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중국 철강업체들은 수주에서 생산,납품까지 두 달 정도 걸립니다. 반면 포스코는 업무 효율화를 통해 이 과정을 2~3주에 끝냈습니다. 중국에서 자동차용 강판 수요가 급격히 늘 때 기민하게 대응해 상당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김반석 LG화학 부회장=올해 처음 겪은 일이 있습니다. 생산라인을 멈춘 것입니다. 외환위기 때도 공장은 돌았었습니다. 한국만 안 좋았지 글로벌시장은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정말 물건 팔 곳이 없었죠.LG화학도 포스코처럼 원가절감에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가격을 낮췄습니다. 가격을 조정하니 매출이 조금씩 되살아나더군요. 물량이 늘고 공장가동률이 높아지고,생산원가는 더 낮아지고….이런 선순환이 경쟁업체보다 빠르게 이뤄진 덕에 웃으면서 연말을 맞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석채 KT 회장=이명박 정부를 보수정권,친기업 정부라고 하잖아요. 다들 겉으로는 이렇게 얘기 안 하지만 정권의 색깔이 노사가 힘을 합쳐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집권 초기 강력한 정책을 편 것도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됐습니다.

◆사회=환율이 떨어지면서 외국 기업들의 공격이 재개되고 있습니다. 내년이 올해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옵니다.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1985년 미국과 일본이 '플라자 합의'를 맺은 뒤 달러당 240엔이던 환율이 80엔까지 떨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잘나갔습니다. 내부 혁신으로 환율 변수를 이겨낸 것이죠.내년에는 원화 가치가 지금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우리가 일본처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1달러에 600~700원 하는 시대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김반석 부회장=데이터를 살펴보니 올해 원화가 작년에 비해 14% 정도 약세였어요. 달러로 매출을 올리는 LG화학 같은 회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숫자였습니다. 내년 환율은 지난해 수준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봅니다. 1100원에서 1200원 사이가 되겠죠.마이너스 요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생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악화되는 게 아니고 원위치되는 것이라고요. 일본이 엔화가 3배 올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신기술 개발과 원가절감이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극복해가야 합니다.

◆사회=중국에 대한 논의가 잠시 있었는데요. 우리에게 뭘까요. 중국이란 나라는….◆이팔성 회장=중국 경제의 성장은 기회이자 위협입니다. 먼저 위협요인부터 얘기해 보죠.가장 큰 문제는 제조업의 기술력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겁니다. 4~5년 정도의 차이 아닐까요. 중국 업체들이 한국 기업들의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갈 것입니다. 좋은 쪽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큰 나라입니다. 서비스,녹색 등 새로운 산업들을 빨리 선점하면 길이 있습니다.

◆김반석 부회장=석유화학 분야만 보면 중국의 기술 수준은 한국과 거의 같습니다. 생산 규모는 오히려 중국이 큽니다. 에틸렌 기준으로 한국은 700만t,중국은 1100만t의 화학제품을 만들어냅니다. 중국이 위협인지 여부는 사실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시장으로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은 앞으로 상당기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지속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들어가야 합니다.

◆정준양 회장=이전 아시아 철강시장은 일본 업체가 맨 앞에 있고 포스코가 뒤를 쫓는 형국이었습니다. 2등 제품을 대량으로 값싸게 팔았지요. 그때는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중국 기업들이 없었으니까요. 지금은 그런 '2위 전략'이 안 통합니다. 연간 13억t에 달하는 세계 철강 생산량 중 5억t을 이미 중국이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은 정공법입니다. 윌리엄 버넷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최근 개최된 대 · 중소기업 상생협력 국제 컨퍼런스 강연에서 포스코를 다섯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포스코가 어려운 곳,남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갔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게 요지였습니다. 경쟁에서 숨으려 하면 역사 속으로 숨게 됩니다. 경쟁을 즐기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석채 회장=어떤 산업강국도 기존의 주력 산업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는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월한 산업이 추월당하기 전에 다른 산업으로 빠르게 옮겨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내부적으로 우리끼리 싸웠을 때 중국과 일본에 당했습니다. 경쟁자는 밖에 있는데 매일 내부의 적들과 싸운 것이 문제였습니다. 안에서 싸움하는 역사에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사회=우리나라가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로 못 가는 이유가 후진적인 노사관계와 정치문화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석채 회장=한국의 노동운동은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전투적이고 강성이라는 게 첫 번째 문제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격한 투쟁을 해야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인식이 노동운동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입니다. 다행히 현 정부 들어 강성투쟁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만 투쟁의 소지를 없앨 수 있도록 좀 더 법과 제도를 손봐야 합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더 큰 문제입니다. 한국은 기업이 처한 상황을 감안해 직원을 내보내는 게 거의 불가능한 나라입니다. 경제성장률이 둔화되면서 새로운 일자리도 줄어드는 추세죠.피해를 보는 것은 젊은 인재들입니다. 삼성,LG,포스코 등 사회의 본류인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협력사 등 주변부로 빠지게 됩니다. 젊은 인재들이 본류에서 정력적으로 일해야 기업이 왕성하게 성장할 수 있는데,우리 사회에는 그런 순환구조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기약 못하는 주변부 기업에 머물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을 지키는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정준양 회장=두 명 이상이면 자유롭게 노조를 결성할 수 있게 한 법규정에 문제가 있습니다. 노조가 여러 개 생기면 선명성 경쟁 때문에 갈등이 많아집니다. 미국이나 일본이 전체 직원 중 20%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노조를 만들 수 있도록 규정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노동경직성과 관련된 지적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한국에서는 여성 일자리 부족으로 대개 남자 혼자 가족 전체를 부양합니다. 한국은 재취업이 힘들고 사회보장 시스템도 약한 나라입니다. 쌍용자동차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가족 전체가 길거리에 나앉게 되다 보니 노동운동이 훨씬 더 전투적으로 됩니다. 해답은 여성 일자리입니다. 여성 일자리를 만들어 한 집에 최소 두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법 질서를 바로잡는 일도 시급합니다. 한국에서 불법 시위를 일삼는 노조가 미국이나 홍콩에 원정을 가면 반드시 법을 지킵니다. 이게 모든 걸 말해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