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구 칼럼] 더불어 사는 사람들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난 '얼굴없는 천사' 이야기는 코 끝을 찡하게 한다. 전주 노송동 주민센터에 전달된 종이박스에는 불우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라며 8000만원이 넘는 돈이 담겨 있었다. 벌써 10년째 선행이 이어졌고 총 기부금 액수는 1억6000여만원에 달한다. 특히 올해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님들이 그러셨듯이 저희 어머님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으신 돈이랍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존경합니다''사랑합니다'라고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메시지까지 남겨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30년 동안 매일 1만~2만원씩을 저축해 장학재단을 만든 서정현씨(61 · 대성조경 대표) 사연은 감동 그 자체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서씨는 14살 때부터 가족 생계를 위해 나무를 해다 팔며 주경야독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어른이 되면 불우한 학생들을 돕는 장학재단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1979년부터 사업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루 1만원씩을 저축해나갔다. 1999년 아내가 사망하자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20년 동안 모은 1억75만원을 순천대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이후엔 하루 저축액을 2만원씩으로 늘려 2억원을 모았고 마침내 장학재단을 만들며 30년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출산장려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식 천호식품 회장(59)은 나라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운영하는 '뚝심카페(cafe.daum.net/kys1005)'에 등록한 뒤 셋째 아이를 출산하면 선착순 115명에게 한 달에 20만원씩 총 20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 12명의 산모에게 장려금을 전달했다. 천호식품 직원들에겐 첫째와 둘째를 낳으면 각 100만원을 주고,셋째를 낳으면 일시금 500만원에다 매달 양육비 30만원을 24개월 동안 지불한다고 한다.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줄을 잇는다.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언급한 광주시 김수자씨는 김밥장사를 해서 버는 한 달 수입 100만원 중 70만원을 기부하는 일을 15년째 계속하고 있다. 가수 김장훈씨는 버는 것을 모두 내놓다시피 하고,선행으로 행복을 얻는 션-정혜영 부부도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런가 하면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불우한 아이들을 입양해 감동을 준다.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기부 · 봉사 활동은 사회적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각종 사회단체 · 종교단체엔 청소년가장 독거노인 등을 도우려는 손길이 줄을 잇고 아프리카 등 해외로까지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자신도 서민이면서 더 힘든 이웃을 돕겠다는 사람, 월급에서 매달 일정액을 꼬박꼬박 후원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원봉사자들이 크게 늘어난 것 또한 두드러진 특징이다. 태풍 홍수 등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드는 것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 태안반도의 기름띠를 깨끗이 제거해낸 것도 바로 자원봉사자들 아닌가. 이들의 선행이 더욱 뜻깊게 다가오는 것은 올해는 경제위기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유례없이 팍팍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온도계가 지난해만큼 따뜻하지 못한 것도 그런 탓이 크다고 본다. 기부나 봉사 활동에 나선 사람들 또한 여유가 별로 없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힘든 여건 속에서도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회지도층과 공직자들의 부패 스캔들이 꼬리를 물어도 사회의 온기를 느끼고,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도 이들 덕분이다.

감동을 주고 세상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출세한 사람 ·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소리없는 가르침을 주고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는 것 역시 이런 사람들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그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이봉구 수석논설위원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