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면 '팔자'니 '운명'이니 하는 말에 기대려 드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작년 12월 초의 토요일 오후,아내의 성화에 영등포에 있는 한 백화점에 갔다. 위층들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본 뒤 아내는 그때껏 군소리 없이 따라다닌 내게 서비스를 할 양인지 지하 식품부로 내려가서 양념꽃게장을 샀다. 혼자 두어끼 먹을 만큼을 스티로폼 그릇에 담던 가게 아주머니가 팔면서 떨어져 모인 집게발들을 덤으로 주겠다고 했다. 나는 싫다 했고,아내는 공짜인데 받아가자고 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당신은 먹지 않을 거면서 왜 그러느냐고,아내를 윽박지르기까지 했는데도 굽히지 않아 결국은 받아오게 됐다.

문제는 저녁을 먹는 동안 일어났다. 혼자서지만 맛있게 양념꽃게장을 먹고 있는데,무엇인지 윗입술의 앞쪽을 툭 치고 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바닥에 또르르 구르는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어,이가 부러졌나 봐!"하고 중얼거렸다. "이가 여기 떨어져 있네, 뭐." 자리에서 일어난 아내가 곧 저만큼 굴러가 있던 이 토막을 주워 들고 와서 내 눈앞에 디밀었다. 재미있어 하는 얼굴이다. 이때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이 바로 그 덤으로 받아온 집게발들 가운데 하나였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있을까. 나는 속으로 아내를 원망했다. 내가 몇 번이나 싫다고 했는데 기어이 받아와서는 이런 낭패를 보게 만드는가. 미안한 생각도 안 드는가. 당신이 내 아내가 맞긴 맞는가.

다음 날 나는 친구들과 오후에 춘천에 가기로 한 약속부터 취소했다. 대신 치과병원으로 갔다. 부러진 이를 이어 붙이기 위해서는 두어 달쯤 병원을 들락여야 하고,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고 했다. 덤으로 받은 게장 집게발한테 치를 대가가 매우 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다시 아내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일어났다. 그 다음 날 꼭두새벽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같이 춘천에 간 친구 셋이 모두 병원에 누워 있으니 빨랑 문병 오라는 것이었다. 새벽에 돌아오는 길이 얼어붙어서 승용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사고가 났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크게 다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내 머리에 '운명'이란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아내가 배시시 웃으면서 돌아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내의 웃음은 자기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뜻 같았다. 사흘 뒤 다시 치과에 갔을 때였다. 치료를 끝낸 의사가 말했다. "이가 좋으시다고 과신하지 마세요. 앞니로 게의 집게발을 씹어 먹다니요….나이도 있으신데…." 그러니까 이가 부러진 것은 아내의 잘못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사고를 당한 것도,운전 중에 걸려온 휴대폰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운명이란 말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었다. 새해에는 내 삶에 좀더 당당해져야 할 듯싶다.

이상문 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 kpma@pap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