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빅 제로'의 시대를 넘어서

선진국 진입 기회의 시간 별로 없어
'더 큰 대한민국' 구체적 그림그려야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지난 10년 미국 경제를 '빅 제로(Big Zero)'의 시대로 규정한 것은 역시 '닥터 둠(Dr.Doom)'다운 면모 그대로다. 2000년 뉴밀레니엄의 전개와 함께 사람들은 큰 기대를 걸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얻은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해 세밑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경제적 관점에서 10년 동안 좋은 일이 없었고,어떤 낙관론도 현실화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선 '제로 고용'과 가계의 '제로 이익'을 들었다. 민간부문 고용감소로 지난해 말 실업률이 10년 전보다 높았고,가구당 평균소득은 자산거품으로 가장 높았던 2007년에도 인플레이션을 반영하면 1999년보다 적었다고 했다. 주택가격이 10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을 뿐 아니라 주식가격 역시 1999년 3월 사상 처음 10,000선을 돌파했던 다우지수가 지난해 말 10,520선을 턱걸이한 것도 '0의 행진'이라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10년이 더 나아질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을 제기했다. 크루그먼의 잣대로 본 우리나라 경제의 지난 10년 또한 '빅 제로'의 시대가 아니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자리가 전혀 늘지 않았던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생산가능인구에서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인 고용률이 1999년 57.5%에서 지난해 말 겨우 59%를 넘겼다. 25~39세의 청년층 고용률은 가장 나빴던 2001년 70.7%보다 낮다. 대학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올봄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1999년 9438달러까지 떨어졌던 1인당 국민소득(GNI)은 지난해 1만7000달러 선으로 늘어났음에도 10여년째 2만달러의 벽에 막혀 있다. 주택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가계의 자산이득을 불리기보다 부채만 엄청나게 키웠다. 무려 700조원을 넘는 가계부채 원리금을 갚느라 서민들은 허리가 휠 지경이다. 국민들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고 보기 힘든 10년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헛된 10년은 아니었고,특히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의 수렁에서 우리는 오히려 희망을 키웠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한 차원 높아진 위기대응 능력,강화된 경제체질 덕분이다. 기업들은 반도체 휴대폰 자동차 선박 철강 등 핵심산업 경쟁력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았다. 이를 자산으로 '불황형'이지만 지난해 사상 최대 무역흑자를 기록했고,숙원이었던 원자력발전 플랜트를 수출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우리는 불과 30여년 전 모든 기술과 자금 · 설비를 미국에 기대 첫 원전을 건설함으로써 원전 개발 막차를 탔던 나라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기적을 말하고,'더 큰 대한민국'으로의 도약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이유다. 무엇을 해야 할까. 더 큰 대한민국에 걸맞은 큰 그림부터 그려야 한다. 선진화 체제로 가기 위한,구호가 아닌 결과로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을 고민하고,흔들림 없이 추진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선진국에 진입하기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최소 필요조건인 국민소득 3만달러를 위해 해마다 몇 %대의 경제성장을 해야 하는지.그 엔진이 무엇인지,성장의 원동력인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교육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어떻게 변혁시킬 것인지,고질적 노사대립 구도를 생산지향적으로 바꿀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프레임이다. 남북문제는 어떤 기조로 관리돼야 하는지,우리가 국제사회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고,글로벌 시민이 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의 그림과 구체적 실행전략도 핵심이다.

오는 11월 서울에서의 G20 정상회의는 그저 선진국 자격을 갖추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우리 경제는 아직 배고프고,갈 길 또한 바쁜데 너무 많은 과제가 앞에 놓여 있다.

추창근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