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성질·성격·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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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30여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직장 선배에게서 나무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나무에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있다는 정도야 초등학생도 알고 있을 상식 수준이었다. 그러나 몸통이 거칠고 잎이 사납게 생긴 침엽수를 영어로 '소프트 우드(Soft-wood)',몸통이 미끈하고 잎이 너그럽게 생긴 활엽수를 '하드 우드(Hard-wood)'라고 부른다는 데는 영 뜻밖이었다. 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설픈 청년의 생각으로 그런 반어법적 명칭에는 무슨 일화나 전설 같은 것이 숨어 있겠거니 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매우 쉬웠다. 나무의 몸통을 잘라보면 침엽수의 속살은 손톱으로 눌러도 흠이 날 정도로 부드러운 반면 활엽수의 속살은 송곳 끝을 박아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서 붙여진 명칭이란다. 성급했던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는 살아남기 위해,그래서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겉과 속을 다르게 해서 사는 생물인데,그 성질에 명칭을 붙인 것이었다.
이때 사람도 그런 것인가 했다. 겉이 온화해 보이는 사람은 속이 단단하고,겉이 강해 보이는 사람은 속이 부드러운가. 키가 큰 사람은 속이 싱겁고,키가 작은 사람은 속이 짭짤한가. 이런 따위의 생각이 줄을 이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당장에는 알 수 없었다. 사람한테는 '성품'이 있고 그 밖의 것들에는 '성질'이 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2~3년 뒤에야 안 일이었다. 사람들이 '성품'을 높임말로,'성격'을 예사말로,'성질'을 낮춤말로 쓰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은 타고난 성질을 고쳐가면서 사는 생물이라서,성질이 성격도 성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한테만 성품이란 말을 써야 했다. 사람 사는 목적이 단순히 자기 종족 보존에만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자신의 재주와 인격을 갈고 닦아 공명을 얻어 품을 인정받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사람의 생김새만큼이나 성질도 재주도 삶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른 새벽부터 푸지게도 눈이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참으로 별천지였다. 나무들을 보았다. 은행나무와 너도밤나무는 가뿐했다. 활엽을 털어 버린 뒤 쓸쓸해 보이던 가지들에 눈이 쌓여 일부러 장식을 한 듯 우아해졌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버겁다. 늘 푸르름으로 빛나던 침엽의 가지들마다 욕심껏 눈을 이고서 끙끙거리고 있다. 금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꺾어져 있기도 했다. 나무의 성질이 그대로 드러난 광경이었다. 한데 이날 정작 난리를 겪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만물의 영장이어서 겉과 속을 수없이 바꿔가면서,성질을 성품으로 격상시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다. 나도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했다. 나무들 보기가 무참했다.
이상문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 kpma@paper.or.kr
이때 사람도 그런 것인가 했다. 겉이 온화해 보이는 사람은 속이 단단하고,겉이 강해 보이는 사람은 속이 부드러운가. 키가 큰 사람은 속이 싱겁고,키가 작은 사람은 속이 짭짤한가. 이런 따위의 생각이 줄을 이었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당장에는 알 수 없었다. 사람한테는 '성품'이 있고 그 밖의 것들에는 '성질'이 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2~3년 뒤에야 안 일이었다. 사람들이 '성품'을 높임말로,'성격'을 예사말로,'성질'을 낮춤말로 쓰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은 타고난 성질을 고쳐가면서 사는 생물이라서,성질이 성격도 성품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한테만 성품이란 말을 써야 했다. 사람 사는 목적이 단순히 자기 종족 보존에만 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자신의 재주와 인격을 갈고 닦아 공명을 얻어 품을 인정받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 사람의 생김새만큼이나 성질도 재주도 삶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른 새벽부터 푸지게도 눈이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참으로 별천지였다. 나무들을 보았다. 은행나무와 너도밤나무는 가뿐했다. 활엽을 털어 버린 뒤 쓸쓸해 보이던 가지들에 눈이 쌓여 일부러 장식을 한 듯 우아해졌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버겁다. 늘 푸르름으로 빛나던 침엽의 가지들마다 욕심껏 눈을 이고서 끙끙거리고 있다. 금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꺾어져 있기도 했다. 나무의 성질이 그대로 드러난 광경이었다. 한데 이날 정작 난리를 겪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만물의 영장이어서 겉과 속을 수없이 바꿔가면서,성질을 성품으로 격상시켜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다. 나도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했다. 나무들 보기가 무참했다.
이상문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 kpma@pap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