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과학벨트, 그 시작과 끝

고용 없는 성장으로 고민하는 국가들이 그 돌파구로 강조하는 것을 보면 과학기술이 빠지지 않는다. 과학기술로 새 산업이 탄생하면 일자리가 생길 것이란 논리에서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무지한 정치인들도 단기간 내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것쯤은 다 안다.

솔직히 말하면 현실적으로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상황에서 과학기술로 시간을 좀 벌어보자는 정치적 계산도 있다. 그렇더라도 과학계로서는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용 없는 성장이 심각했던 노무현 정부가 과학기술부를 부총리 부처로 격상시켰고,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과학기술 투자를 크게 늘리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정치는 과학기술을 망치기도 하지만 반대로 동력이 되기도 한다. 우주도전의 역사에서 미국과 소련의 체제경쟁과 내부에서의 정치경쟁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이 단적인 사례다. 세종시 수정안의 핵심과제인 과학비즈니스벨트는 과연 어느 쪽이 될 것인가.

혹자는 과학비즈니스벨트가 세종시 수정을 염두에 둔 이명박 정부의 비책이었다는 말도 한다. 그러나 그건 과장됐거나 결과론적 해석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당초 중이온 가속기 건설,기초과학연구원 설립 등 과학비즈니스벨트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대선공약이었던 만큼 지난해 과학비즈니스벨트 종합계획안이 나오고,특별법이 국회에 제출됐다. 문제는 예산확보나 입지선정 문제가 간단치 않았고,예산을 나눠가져야 하는 과학계 내부의 이견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뭔가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던 차에 세종시 수정이 본격적으로 불거졌고,과학비즈니스벨트는 그 핵심적 대안으로 떠올랐다. 과학비즈니스벨트가 세종시로 굳어져 갈 때쯤 과학계는 과학입지가 정치논리로 결정돼선 안 된다는 비판을 내놨다. 과학계로서는 정치 쪽에서 큰 사고를 쳐놓고,그 수습용으로 과학을 이용하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과학계는 정치적 추진동력을 확보할 수도 있다. 잘되면 가장 큰 문제인 예산확보가 일거에 해결되고,절실했던 기업과 대학 유치도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되돌아보면 1970년대 대덕연구단지 추진도 당시의 정치,경제적 배경과 무관했다고 볼 수 없다. 박정희 정권의 과학적 열정이 물론 컸지만 중화학공업화 선언,그 이면의 자주국방 열의,그리고 북한이라는 현실적 위협 등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서 자생적 연구단지는 나오기 어렵다고 말한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워싱턴 DC에서 가장 멀었기에 성공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정치적 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과학을 알아서 좋은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하다. 정치가 과학을 망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고,우연히도 정치적 동기가 과학발전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작용한다면 큰 행운이다. 세종시 원안이냐 수정안이냐 정쟁속에 과학비즈니스벨트마저 수포가 돼버리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행정수도 이전으로 시작된 일이 오창-오송-세종-대덕을 잇는 한국판 실리콘밸리로 바뀌는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만들어질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후자가 되길 바랄 뿐이다.

논설위원·경영과학傳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