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사극(史劇)

"상놈들 세상에선 나이(젊음)가 벼슬이야." 연초부터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인 사극(史劇) '추노(推奴,KBS2)'에 나오는 주인공(대길)의 대사다. 대길은 추노꾼 패거리를 떠나 독립한 자신에게 옛 두목이 자기 밑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하자 어림없다며 이처럼 내뱉는다.

'추노'는 병자호란 뒤인 17세기 초,이어진 전란(戰亂)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노비로 전락한 시절 도망간 노비를 쫓는 추노꾼 이야기다. 다소 어둡게 느껴질 수 있는 이 드라마가 뜬 건 주연 배우들(장혁 · 오지호)의 근육질 몸매와 화려한 액션 덕도 있지만 신산스런 세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절박함이 시대를 넘어 공감을 자아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제중원(濟衆院,SBS)'과 '명가(名家,KBS1)'역시 새로운 소재의 사극으로 눈길을 끈다. 제중원은 1885년 2월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극은 제중원을 배경으로 백정이란 신분을 극복하고 의사가 되는 황정(박용우)과 역시 의사를 꿈꾸는 양반 출신 백도양(연정훈)을 통해 구한말 이 땅의 세태와 갈등을 그린다.

'명가'는 청부(淸富)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주 최부잣집 얘기다. 12대 300년에 걸친 부(富)의 토대를 마련한 최국선(차인표)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정당하고 도덕적인 부(富)의 축적과정을 얘기한다. 이문을 추구하되 약자를 배려하는 장길택과 고리대금 및 매점매석을 일삼는 김자춘을 대비시켜 돈벌이의 윤리관도 제시한다.

'추노'가 고단하고 기막힌 상황에서도 삶의 좌표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면 '제중원'은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꿈을 이뤄가는 의지의 한국인을 보여주고,'명가'는 부(富)의 참된 가치와 부자의 역할을 재조명하는 셈이다. 이들 사극엔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고,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돕는 이도 있고,개인적 이익보다 정과 의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나온다. 다소 설교조로 들리는 대목이 없지 않지만 옳고 바른 삶,인간다운 삶의 전형을 설정해 보이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두 남자와 한 여자(두 여자와 한 남자)도 모자라 두 남자와 두 여자를 꼬고 또 꼰 복수극 아니면 나쁜 남자로 통칭되는 까칠남과 가난한 여자를 엮는 신데렐라 드라마에 끔찍할 정도의 가족이기주의를 비벼 넣은 현대극들 틈에서 이들 사극이 돋보이는 이유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