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뉴스] 유명 연예인들의 혼전임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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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애를 밴 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시대마다 크게 바뀌어 왔다. 사람 사는 세상에 남여가 눈이 맞아 속도위반으로 때 이르게 애를 만든 사례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혹은 용인하느냐 여부는 시대마다 큰 차이를 보여왔다.
이같은 혼전임신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역사서 보다는 시대상을 반영한 문학 속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그레첸의 비극’역시 혼전임신을 바라보는 당시 사회의 도덕율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것이 비극인지, 코메디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암호인지 알 수 없다.
악마와 계약을 맺고 젊어진 파우스트가 우연히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순진한’ 처녀 그레첸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파우스트의 아이를 낳게되고, 이에 따라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수치속에 죽게 되고 정신나간 그레첸은 자신의 아이마저 물에 던져 죽게 만들게 된다. 결국 본인의 목숨마저 잃게되는 것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이처럼 순진한 처녀가 사랑에 빠져 미혼모가 되고 그 두려움에 아기를 살해하는 이야기는 피임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괴테 시대에 심심찮게 일어나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해서 괴테시대에 그런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관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물가에서 그레첸이 친구 리스헨과 나눈 대화는 당시 혼전임신에 대한 사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혼전임신을 한 상태에서 남자에게 버림받은 베르벨헨이라는 처녀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리스헨은 이 친구의 불행에 대해 전혀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같은 애들이 물레곁에 앉아 있을 때, 그 계집애는 애인곁에 붙어앉아 단맛을 보고,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지내지 않았니. 그러니 이제 어딜가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수옷을 입고 교회에 나가 참회해야 할 거야(3562∼3569행)”라는 게 리스헨의 일갈이다. 이 발언속에서 남의 불행을 즐기는 사악한 마음과 시민 사회의 도덕 규범을 무시하고 혼전 임신을 한 처녀에 대한 증오에 찬 경멸만이 읽혀질 수 있을 뿐이다.
그 베르벨헨이란 처녀가 구원받을 길은 애아빠가 책임져 주는 것 뿐인데 리스헨은 “약삭빠른 사내들이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놀아날 기회가 있다”며 “벌써 달아나버렸다”며 혼전임신여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전한다.(3571∼3573행) 이런 베르벨헨의 암담한 운명은 청순녀, 순진녀의 상징인 그레첸에게도 닥치게 된다.
처음 파우스트가 그레첸을 거리에서 봤을 때는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파우스트에게 다가왔다. 이효리의 ‘텐미닛’이란 노래가 떠오를 법한 파우스트의 대사는 바로 “내게 일곱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저런 계집애 하나 꼬시는데 악마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을 텐데(2642-2644행)”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 그레첸의 방으로 들어가 그야말로 순백의 순진무구한 그레첸의 삶을 본뒤 순수한 사랑을 느낀 파우스트는 그레첸과 ‘예쁜’사랑을 나누지만 결혼이란 사회적 보호막속에 그레첸을 넣지는 않는다. 파우스트는 그레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와 결혼해 소시민 세계에 갇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기에는 욕망이 너무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레첸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고, 따라서 순진한 애인을 불행하게 만들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녀의 육체를 탐했던 것이다. 게다가 ‘철학적’측면에서 그레첸과의 사랑을 행복한 결말로 이끌려면 파우스트는 그녀의 삶의 척도와 수준에 자신을 맞춰야했는데 이런저런 지적욕구가 강했던 파우스트로선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우스트가 그레첸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도 낳고,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소시민의 삶은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맺으면서 추구했던 절대적 주제로서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것이었고, 자아의 성취나 의지의 실현등에 대한 꿈은 잊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자유인을 포기하고 성실한 소시민이나 고루한 속물이 되는 길을 택해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파우스트에겐 그레첸과의 결혼이 ‘자아실현’의 걸림돌이었지만 그레첸에겐 결혼을 못한다는 것은 온갖 사회의 잔혹한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었다. 소시민적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남녀간 사랑은 교회의 축복을 받는 정식 결혼에 이르러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결혼이 불가능한 사랑은 아무리 순수하고 진지하다 할지라도 사회도덕에 따라 저주받아야 할 패륜으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었다.
그레첸이 속한 소시민적 사회는 그녀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률을 예쁘게 준수하는 인형이기를 거부하자 순식간에 철저하게 적대적인 낯선 세계로 변모했다. 그녀가 파우스트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의 진실은 중요한게 아니었고 오직 혼전임신을 했다는 죄에 대한 단죄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자신의 동생을 끔찍히 아끼고 자랑스러워 했던 그레첸의 오빠 발렌틴은 이같은 사회관념을 온몸으로 체화한 인물이었다. 그가 가문과 동생의 명예에 먹칠한 파우스트와 싸우다 파우스트의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누이동생에 대한 저주였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그의 뇌리를 억누른 것은 누이동생이 혼전 임신으로 집안과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줬다는 생각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칼싸움 실력이 부족해 파우스트의 칼에 찔려서가 아니라 치욕때문에 죽는 것으로 일종의 자기위안을 삼기도 했다. 견고하게 굳어버린 도덕관과 명예심만 가지고 있던 발렌틴은 동생을 향해 “네가 명예를 버리고 말한 것이, 내 가슴을 찌른 아주 치명적인 일격이었다(3772∼3773행)”고 말할 정도다.
한마디로 발렌틴에게 누이동생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그저 사회적 치욕일뿐이었다. 아이를 생명으로 대우하지 않고 “그 치욕의 씨앗이라도 잉태하게 되면(3740행)”식으로 말해버린 것이다. 또 장차 태어날 아이가 치욕에 불과한 것처럼 도덕적 금기를 범한 누이동생은 단순한 ‘창녀(3730행)’에 불과했고 결국 아이도 어머니도 그의 도덕관에선 인간이 아닌 상태였다.
이어 말한 발렌틴의 저주는 저주이자 당시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미혼모의 굴레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벌써 그런때가 올 것이 훤히 보이는구나
점잖은 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역병에 죽은 시체를 피하듯
창녀인 너를 피해 가는 때가 말이다.
금목걸이도 이젠 걸고 다닐 수 없으리라
교회에선 제단 앞에 서지도 못할 것이다
캄캄한 비판의 구석에 처박혀
거지와 병신들 틈에 숨어 지내야 할 것이다(3750-3761행)”
결국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오랫동안 할말 다하고 죽는 발렌틴의 저주는 “비록 하느님이 너를 용서하신다 할지라도, 지상에선 너는 저주받은 인간이어야 한다(3762∼3763행)”는 말로 끝을 맺게된다. 한마디로 신이 용서하는 죄인도 용서할 수 없다는 당시 사회의 소시민적 도덕관을 요약하는 말인 것이다.
결국 이런 광기어린 집단 가학을 견디지 못한 그레첸은 어머니를 독살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그녀와 파우스트 사이에 태어난 영아를 물에 던져 죽인뒤 이런 모든일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게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만들어지고,사람들의 가슴을 적실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사회적 도덕관념이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잇따라 혼전임신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축하한다”는게 주류인 듯 싶다. 당연히 두 사람간 진실한 사랑의 결실은 축복받고 축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혼전임신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엄청나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데 조금 놀라기도 했다. 아마 한세대쯤 후에는 『파우스트』를 읽더라도 그것이 왜 비극이고, 그레첸이 왜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됐는지 이해하는게 너무 어려워지는 시대가 될지도 모를 듯 싶다.
<참고한 책>
괴테, 파우스트,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009
김수용, 괴테 파우스트 휴머니즘-신이 떠난 자리에 인간이 서다, 책세상2004
안삼환 편, 괴테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여성들, 서울대학교출판부2005 ☞ 블로그 바로가기
이같은 혼전임신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역사서 보다는 시대상을 반영한 문학 속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그레첸의 비극’역시 혼전임신을 바라보는 당시 사회의 도덕율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것이 비극인지, 코메디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암호인지 알 수 없다.
악마와 계약을 맺고 젊어진 파우스트가 우연히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순진한’ 처녀 그레첸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파우스트의 아이를 낳게되고, 이에 따라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수치속에 죽게 되고 정신나간 그레첸은 자신의 아이마저 물에 던져 죽게 만들게 된다. 결국 본인의 목숨마저 잃게되는 것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이처럼 순진한 처녀가 사랑에 빠져 미혼모가 되고 그 두려움에 아기를 살해하는 이야기는 피임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괴테 시대에 심심찮게 일어나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해서 괴테시대에 그런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관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물가에서 그레첸이 친구 리스헨과 나눈 대화는 당시 혼전임신에 대한 사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혼전임신을 한 상태에서 남자에게 버림받은 베르벨헨이라는 처녀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리스헨은 이 친구의 불행에 대해 전혀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같은 애들이 물레곁에 앉아 있을 때, 그 계집애는 애인곁에 붙어앉아 단맛을 보고,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지내지 않았니. 그러니 이제 어딜가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수옷을 입고 교회에 나가 참회해야 할 거야(3562∼3569행)”라는 게 리스헨의 일갈이다. 이 발언속에서 남의 불행을 즐기는 사악한 마음과 시민 사회의 도덕 규범을 무시하고 혼전 임신을 한 처녀에 대한 증오에 찬 경멸만이 읽혀질 수 있을 뿐이다.
그 베르벨헨이란 처녀가 구원받을 길은 애아빠가 책임져 주는 것 뿐인데 리스헨은 “약삭빠른 사내들이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놀아날 기회가 있다”며 “벌써 달아나버렸다”며 혼전임신여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전한다.(3571∼3573행) 이런 베르벨헨의 암담한 운명은 청순녀, 순진녀의 상징인 그레첸에게도 닥치게 된다.
처음 파우스트가 그레첸을 거리에서 봤을 때는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파우스트에게 다가왔다. 이효리의 ‘텐미닛’이란 노래가 떠오를 법한 파우스트의 대사는 바로 “내게 일곱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저런 계집애 하나 꼬시는데 악마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을 텐데(2642-2644행)”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 그레첸의 방으로 들어가 그야말로 순백의 순진무구한 그레첸의 삶을 본뒤 순수한 사랑을 느낀 파우스트는 그레첸과 ‘예쁜’사랑을 나누지만 결혼이란 사회적 보호막속에 그레첸을 넣지는 않는다. 파우스트는 그레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와 결혼해 소시민 세계에 갇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기에는 욕망이 너무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레첸의 운명을 책임질 수 없고, 따라서 순진한 애인을 불행하게 만들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결과적으로 그녀의 육체를 탐했던 것이다. 게다가 ‘철학적’측면에서 그레첸과의 사랑을 행복한 결말로 이끌려면 파우스트는 그녀의 삶의 척도와 수준에 자신을 맞춰야했는데 이런저런 지적욕구가 강했던 파우스트로선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우스트가 그레첸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도 낳고,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소시민의 삶은 파우스트가 악마와 계약을 맺으면서 추구했던 절대적 주제로서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것이었고, 자아의 성취나 의지의 실현등에 대한 꿈은 잊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자유인을 포기하고 성실한 소시민이나 고루한 속물이 되는 길을 택해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파우스트에겐 그레첸과의 결혼이 ‘자아실현’의 걸림돌이었지만 그레첸에겐 결혼을 못한다는 것은 온갖 사회의 잔혹한 공격에 노출되는 것이었다. 소시민적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남녀간 사랑은 교회의 축복을 받는 정식 결혼에 이르러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결혼이 불가능한 사랑은 아무리 순수하고 진지하다 할지라도 사회도덕에 따라 저주받아야 할 패륜으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었다.
그레첸이 속한 소시민적 사회는 그녀가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률을 예쁘게 준수하는 인형이기를 거부하자 순식간에 철저하게 적대적인 낯선 세계로 변모했다. 그녀가 파우스트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의 진실은 중요한게 아니었고 오직 혼전임신을 했다는 죄에 대한 단죄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자신의 동생을 끔찍히 아끼고 자랑스러워 했던 그레첸의 오빠 발렌틴은 이같은 사회관념을 온몸으로 체화한 인물이었다. 그가 가문과 동생의 명예에 먹칠한 파우스트와 싸우다 파우스트의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누이동생에 대한 저주였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그의 뇌리를 억누른 것은 누이동생이 혼전 임신으로 집안과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줬다는 생각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칼싸움 실력이 부족해 파우스트의 칼에 찔려서가 아니라 치욕때문에 죽는 것으로 일종의 자기위안을 삼기도 했다. 견고하게 굳어버린 도덕관과 명예심만 가지고 있던 발렌틴은 동생을 향해 “네가 명예를 버리고 말한 것이, 내 가슴을 찌른 아주 치명적인 일격이었다(3772∼3773행)”고 말할 정도다.
한마디로 발렌틴에게 누이동생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그저 사회적 치욕일뿐이었다. 아이를 생명으로 대우하지 않고 “그 치욕의 씨앗이라도 잉태하게 되면(3740행)”식으로 말해버린 것이다. 또 장차 태어날 아이가 치욕에 불과한 것처럼 도덕적 금기를 범한 누이동생은 단순한 ‘창녀(3730행)’에 불과했고 결국 아이도 어머니도 그의 도덕관에선 인간이 아닌 상태였다.
이어 말한 발렌틴의 저주는 저주이자 당시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미혼모의 굴레같은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벌써 그런때가 올 것이 훤히 보이는구나
점잖은 이 고을 사람들이 모두
역병에 죽은 시체를 피하듯
창녀인 너를 피해 가는 때가 말이다.
금목걸이도 이젠 걸고 다닐 수 없으리라
교회에선 제단 앞에 서지도 못할 것이다
캄캄한 비판의 구석에 처박혀
거지와 병신들 틈에 숨어 지내야 할 것이다(3750-3761행)”
결국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오랫동안 할말 다하고 죽는 발렌틴의 저주는 “비록 하느님이 너를 용서하신다 할지라도, 지상에선 너는 저주받은 인간이어야 한다(3762∼3763행)”는 말로 끝을 맺게된다. 한마디로 신이 용서하는 죄인도 용서할 수 없다는 당시 사회의 소시민적 도덕관을 요약하는 말인 것이다.
결국 이런 광기어린 집단 가학을 견디지 못한 그레첸은 어머니를 독살하고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그녀와 파우스트 사이에 태어난 영아를 물에 던져 죽인뒤 이런 모든일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게 된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만들어지고,사람들의 가슴을 적실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사회적 도덕관념이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잇따라 혼전임신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축하한다”는게 주류인 듯 싶다. 당연히 두 사람간 진실한 사랑의 결실은 축복받고 축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혼전임신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엄청나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데 조금 놀라기도 했다. 아마 한세대쯤 후에는 『파우스트』를 읽더라도 그것이 왜 비극이고, 그레첸이 왜 그런 운명에 처하게 됐는지 이해하는게 너무 어려워지는 시대가 될지도 모를 듯 싶다.
<참고한 책>
괴테, 파우스트,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009
김수용, 괴테 파우스트 휴머니즘-신이 떠난 자리에 인간이 서다, 책세상2004
안삼환 편, 괴테 그리고 그의 영원한 여성들, 서울대학교출판부2005 ☞ 블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