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기술' 유출] 스파이로 돌변한 美 협력사…설치·관리 빌미로 기밀 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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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업체 '삼성 반도체 기술' 유출 충격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코리아(AMK)가 삼성전자의 핵심 반도체 기술을 불법 유출한 사건으로 삼성뿐만 아니라 기업들 전체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보안을 자랑하는 삼성의 핵심 기밀이 외부로 누출됐다는 사실도 놀랍지만,그동안 산업보안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해외 부품 · 장비업체가 무려 6년에 걸쳐 '산업 스파이' 노릇을 해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의 허술한 산업보안 시스템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AMK는 특히 삼성이 아직 발표하지도 않은 20나노급 플래시메모리 기술 자료까지 유출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어 세계 반도체업계 전반에 적지 않은 여파가 예상된다. ◆"도대체 누가 피해자인가"
이번 사건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계 반도체장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미국계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의 사업 구조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 하이닉스 엘피다 마이크론테크놀러지 등 세계 유수의 메모리반도체 업체들에 장비를 납품하고 있는 기업으로 거래선들의 제조공정 기밀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에칭 마스킹 등 일반인들이 알기 어렵지만 수조원대의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는 첨단 제조공정들을 각 사별로 줄줄이 꿰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본사는 이번 사건을 한국법인에 국한된 것으로 몰아가고 있지만,해외법인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다국적 기업의 속성에 비춰볼 때 한국법인(AMK)이 본사에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이 같은 범법행위를 단독으로 저질렀는지도 의문이다.
삼성전자가 오래 전부터 AMK의 동향에 의심을 품고 관련 직원들의 교체를 요구했지만,검찰 수사 결과 기술 유출을 주도한 인물들이 오히려 본사 임원으로 영전한 것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이번 사건의 피의자 격인 하이닉스가 검찰에 자사 기술의 유출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사를 의뢰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실제 하이닉스는 자사의 기술정보가 AMK와 거래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업체들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비록 이번 수사가 하이닉스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협력업체나 장비업체 등을 통해 경쟁사들의 기술개발 동향을 공유하는 업계 관행에 비춰볼 때 우리도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어설픈 비즈니스 관행이 낳은 대형 범죄AMK는 무려 95건에 달하는 반도체 기술을 유출하는 과정에서 삼성 측 직원을 매수하거나 경쟁사의 기술취득 욕구를 교묘히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다. 자사 장비를 원활하게 공급하는 도구로 기술 유출을 활용했다는 얘기다. AMK는 특히 동종업계의 친분관계를 활용,반도체-장비-부품업계로 이어지는 공급사슬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기도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연구개발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반도체 업계에서 별다른 대가 없이 무더기로 핵심 기술들이 빠져나간 것은 제조업체와 장비업체 직원들이 수년간 교류하며 쌓은 친분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AMK의 한 직원은 삼성 직원의 미국 출장에 동행해 D램과 낸드플래시 개발 계획이 담긴 파일을 USB 메모리를 통해 통째로 넘겨받은 뒤,후발주자인 하이닉스 측에 넘겨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삼성 직원이 특별한 대가를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업계에 만연한 기술 베끼기 경쟁이 일종의 '도덕불감증(모럴 해저드)'을 낳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이닉스가 입수한 삼성 기술로 어떤 경제적 이득을 봤느냐도 중요하지만,이번 사건의 중대성은 유출경로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다. 검찰은 "하이닉스가 습득한 삼성 기술과 현 공정기술과의 인과관계를 규명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해외에 언제,어느 정도 규모로 유출됐는지 여부도 알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한국 검찰이 미국 기업 본사를 수사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감안하면 검찰이 추가로 수사를 확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최신 기술인 20나노 플래시메모리,30나노급 D램 기술이 유출된 정황을 볼 때 이번 사건의 피해는 섣불리 가늠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특히 국내 기업들의 기술이 후발업체들인 대만이나 다른 나라 업체들에 넘어갔을 경우엔 그 피해가 고스란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어 정보 당국뿐만 아니라 업계 전반의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